언론인 김병관
김병관 회장이 발행인이라는 직함을 갖고 동아일보의 전면에 나선 것은 1987년 2월 28일 제61기 정기 주주총회였다. 총회는 당시 부사장이었던 화정을 발행인에 전격 선임했다. 부사장인 그가 발행인에 선인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87년은 5공 말기. 권위주의 정권의 압제와 전횡이 극에 달했고 동아일보는 이에 저항해 연일 비판의 필봉을 휘두를 대였다.
당시 정권 담당자들은 그때 신문제작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던 화정이 동아일보의 비판적 보도태도의 중심인물이라고 믿고, 어떻게든 회유하려고 들었다. 화정은 이미 1986년 9월에 안기부의 안가에 불려가 고위 책임자로부터 심하게 협박을 받은 적도 있었다. 당시 이 책임자는 폭언과 함께 화정의 신변까지도 위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아일보도 대비를 해야만 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 언론 자유가 또 한발 후퇴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동아일보의 대비책은 화정을 발행인으로 선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발행인 김병관 시대는 고난 속에서 막을 열었다.
화정이 발행인에 취임한 첫해인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엄혹했던 그해 1월19일자 동아일보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 제하에 1면 전부를 이 사건 관련 기사로 채웠다. 그뿐 아니라 당시 발행면수 12면 중 6개면에 걸쳐 국가 공권력의 만행을 고발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그해 6월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돼 한국 민주화의 전환점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1989년 4월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장 취임사에서 화정은 ‘제2창간의 결의를 다지며’라며 이렇게 말했다.
“처절한 5공 억압 속에서 우리가 동아의 자유혼을 충분히 발휘했는지, 우리 선인들이 시범했던 그 불요불굴의 용기로써 본보의 창간정신을 빛냈는지, 여기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언론이 예외 없이 ‘5공 체제에 편입되었다’는 국민의 따가운 눈초리를 의식하며, 역부족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에 앞서 앞으로는 지난날보다 더욱 사랑받고 애독자 여러분의 신뢰를 한 몸에 지닐 수 있는 신문이 되고자 굳은 결의를 다지는 바입니다.”
언론사 사장으로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허심탄회하고 진지한 성찰이었다.
화정은 동아일보 회장 시절 “신문제작 때 경영진의 눈치를 보지 말라”는 원칙을 천명했다. 대형 사회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신문 논조에 경영진이 개입한다는 오해가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과 관련해, 신문 제작 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첫째 대상은 독자, 즉 국민임을 강조한 것이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관계를 맺자 화정은 곧바로 베이징(北京)을 방문해 인민일보와 공식적인 제휴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95년 리펑(李鵬) 중국 총리와 한국 언론 사상 처음으로 단독 회견을 하는데 성공했다. 한중수교 후 많은 언론사가 추진했지만 못했던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발행인이 직접 외국의 국가원수를 방문 취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당시 화정은 리 총리로부터 “장쩌민(江澤民)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 제3세대로 권력교체가 완료됐다”는 발언을 이끌어내 덩샤오핑(鄧小平) 이후 중국 권력체제 윤곽을 확인하는 특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