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박태근전 동아일보 건설팀 국장
나는 1985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화정 회장님께서 부사장이 되던 해다. 30년 근무 기간 중 절반 이상 화정 회장님을 모셨다. 화정 회장님께서 동아일보와 고려대에 변화의 숨결을 불어넣는 모습을 때로는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1980년대는 동아일보에 확장과 개발의 시대였다. 1981년 지면을12면으로 늘렸고 이어 1988년에는 16면이 됐다. 오래된 광화문 사옥은 좁았다. 6층 전체를 사용했지만 그래도 부족해 광고국 판매국 등은 인근 교보빌딩을 써야 했다. 그래서 화정 회장님께서는 ‘제대로 된새 사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품으셨던 듯하다. 첫 작업은 강원 춘천사옥과 부산 사옥을 전면 재설계해 건설하는 일이었다. 1990년 충정로 사옥을 착공했고, 1997년에는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를 짓기 시작했다.
화정 회장님은 과감했다. 안정보다는 적극적인 투자를 생각했다.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움직여야 조직이 발전한다고 강조했다. 환경뿐만 아니라 조직의 혁신도 늘 강조했다. 화정 회장님은 “사옥을 옮기면 사람도 변해야 한다. 투자를 통해 환경이 바뀌면 업무 방식과 시스템도 그게 걸맞게 변화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3년 대구와 광주 사옥, 1994년 대전 사옥, 1995년 경기 안산 공장 건설도 주도했다.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과 ‘의지’다. 메디치 가문이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지원한 덕분에 그들의 예술적 성취가 빛난 것이 대표적이다. 건축에 대한 화정 회장님의 의지는 남달랐다.언제나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한옥을 시멘트로 지으면 더 튼튼할 텐데 흙으로 짓는 이유가 있느냐”라거나 “건물 기둥이 이 정도 간격으로 서는 것이 맞느냐”고 세세한 것도 묻곤 했다.
화정 회장님의 거침없는 추진력은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를 지을 때도 빛났다. 1997년 5월 착공하면서 2000년 1월 1일에 맞춰 입주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여기저기서 ‘가능할까’라는 걱정이 나왔다. 하지만 오히려 당시 예정보다 공사 기간을 약 3개월단축해 결국 2000년 1월 1일 입주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새 밀레니엄 시대를 광화문에서 열 수 있었다.
화정 회장님은 고려중앙학원의 교육 시설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2001년 서울 종로구 계동의 중앙고등학교를 보수했다. 칠판과 유리창, 화장실을 수리하고 포장 공사도 새로 했다. 그 덕분에 중앙고에선 드라마 ‘겨울연가’를 촬영하기도 했다. 중앙중학교는 보수작업을 할 경우 나오는 지원금을 마다하고 2000년 아예 신축 공사를 했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며 기뻐하던 학생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려대 대운동장을 지금의 중앙광장으로 탈바꿈시킨 것도 화정회장님이다. 화정 회장님은 내게 “단과대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들이 누릴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정은인테리어 하나까지 꼼꼼하게 검토할 정도로 관심이 컸다. 그 의지 속에서 일제강점기 잔재였던 대운동장은 대지 면적 2만7000㎡가 넘는 녹지와 잔디광장으로 변모했다. 차량 1000여 대를 세울 수 있는 지하주차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동아일보와 고려중앙학원의 개발과 변화에는 이렇게 과감한 화정회장님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검소하고 소탈했다.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외부의 청탁에는 단호했다. 그 모습을 본 나와 직원들은 부정하게 업무 처리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많은 공사를 하시면서 단 한 번도 어느 업체를 선정하라든지, 누구에게 건축을 맡기라든지 하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화정 회장님은 거창한 식사보다는 국밥을 좋아하셨다. 뜨거운 국밥을 후후 불어가며 나보다 두 배나 빨리 드시곤 했다. 겨울철 가회동 자택은 난방을 아껴서 한기(寒氣)가 돌 정도였다.
화정 회장님의 업적은 훨씬 더 엄청나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그 점이 안타깝다. 내가 모신 화정 회장님은 과감하고 열정적이었다.동시에 검소하고 단아했다. 내가 화정 회장님을 지금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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