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이용훈전 대법원장
화정 선생은 마음이 넓고 아량이 넘치는 경영인이었다. 절체절명 위기가 닥치자 직원들을 보호하고 모든 책임을 혼자 떠안는 모습을 봤다. 그는 나은 회사,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 함께, 더불어 잘 지내야한다는 신념이 투철했다.나는 화정 선생 가문과 사적인 인연이 있다. 내 아내(고은숙)의 고모가 인촌 김성수 선생의 일곱 번째 아들인 김남 제13대 국회의원의부인(고영희 여사)이다. 내 처고모가 화정 선생의 숙모다. 젊었을 때 김남 의원 댁을 방문해 인촌과 일민, 화정 선생의 인품을 전해 들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리나라 대표 언론인 동아일보에 각별한 애정이 있었다. 1974~1975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 나는 현직 판사 신분으로 친구들과 더불어 동아일보에 두 차례 백지광고를 냈다. 가슴 졸이는 일이었다. 동아일보가 백지광고를 낸 사람들에게 선사한 메달 2개를 지금도 집에 보관하고 있다.
동아일보 경영인이던 화정 선생을 내가 처음 만난 건 2001년이었다. 대법관을 지낸 뒤 변호사 개업을 한 직후였다. 당시 정부가 동아일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사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벌였다. 이른바 ‘언론사 세무조사 사건’이었다. 화정 선생은 나를 변호사로 선임했다. 당시 동아일보 법조팀장이었던 이수형 씨 소개로 변호를 맡게 됐다.
화정 선생은 검찰 조사를 받고 구속까지 됐지만 의연했다. 부하 직원들에게 작은 책임도 떠넘기지 않았다. 경리 실무를 담당한 회사 간부나 평사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화정 선생이 모든 걸 떠안았기 때문이다. 검찰이나 경찰 수사를 받는 회사 대표가 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화정 선생은 그런 사람들과 달랐다. 희생의 미덕을 알았다. 통이 크고 선이 굵었다. 주변 사람들을 품을 줄 알았다.
화정 선생이 검찰 수사를 받던 도중 부인이 돌아가셨다. 충격이 엄청났을 텐데 그는 잘 견뎌냈다. 옥살이로 건강이 나빠진 화정 선생이 구속집행 정지로 석방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구속했던 검사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수고 많았다”며 인사했다. 그는 그런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화정 선생이 석방된 날 서울 인사동 한정식집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화정 선생은 변론이 충분하지 못했다며 서운한 감정을 나타냈다. 나는 강한 어조로 반론을 했다. 화정 선생은 기분이 안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1년 반쯤 지난 뒤 나에게 중요한 일을 맡겼다. 묵은 감정이 있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2003년 초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이었던 화정 선생 제안으로 나는 고려대 총장후보자 추천위원장이 됐다. 당시 고려대는 총장 선발 방식을 직선제에서 간선제로 바꿨다. 추천위원회가 후보 2명을 선발하면 고려중앙학원 이사회가 1명을 낙점하는 방식이었다.
화정 선생은 총장 추천 과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후보가 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기미도 없었다. 나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지냈던 경험을 살려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후보를 2명으로 압축했다. 그중 1명인 어윤대 교수가 아무 잡음 없이 총장이 됐다. 화정 선생은 공정한 절차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었다. 믿고 일을 맡길 줄 아는 경영인이었다.
2005년 대법원장이 된 뒤 화정 선생이 목에 이상이 생겨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려대 안암병원으로 병문안을 가려고 연락했다. 하지만 화정 선생은 한사코 오지 말라고 했다. 결국 그가 2008년 2월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화정 선생과의 인연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다. 나는 2014년 2월부터 화정 선생의 장남인 김재호 동아일보·채널A 사장의 요청으로 인촌기념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