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홍두표TV조선 회장
“단단히 잡으시오. 잘못 하면 날아가요!”남극에서 털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동아일보 깃발을 얼음 위에 꽂고 손으로 V자를 그린 김병관 회장(당시 동아일보 사장)의 긴장 속의 진지한 표정-그 껌벅껌벅하는 눈망울-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절로 난다. 1993년 1월 27일 1면에 게재될 ‘동아일보 남극에 서다’ 사진은 내가 촬영하고, ‘중앙일보 남극에 서다’는 김 회장이 촬영한 사진이다.막중한 사진을 서로 찍어 주고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는 잘 찍었는데 당신이 잘못 찍어 동아일보 사진은 잘 나오고 중앙일보 사진은 못 나와도 걱정이고, 그 반대여도 문제였다. 제대로 안 나오더라도 일기불순 속의 촬영이니 그냥 내자고 약속을 하면서 둘이 박장대소를 했다. 아마추어 사진기자이고 요즘 같은 디지털 기술도 없었는데 다행히 사진은 잘 나왔다.
게재 일자를 정하며 웃었던 기억도 난다. 김 회장은 “여보, 당신은머리가 팍팍 돌아가니까 기사 먼저 쓸 수도 있잖아. 그러면 안 돼” 하며 걱정을 했다. “절대 그럴 일 없다. 같이 결정하자.” 그래서 동아와 중앙이 한날 동시에 1면 사진과 함께 한 면 씩을 터서 “南極을 녹이는 ‘과학한국’의 꿈-킹조지섬 ‘세종科學기지’를 가다” 기사를 실을 수 있었다. 남극 세종과학기지 설립 5주년 기념 남극 방문기가 게재된 것이다.
당시 김 회장은 한국신문협회 회장이었고, 나는 부회장이었다. 남극기지에서 김길홍 이철 김정남 의원 등 3당 총무단 및 경제과학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등과 신문협회장을 초청했는데 사실 내가 참여한 것은 김 회장 덕분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초 초청 대상이 아니었으나 김 회장이 중앙일보 홍 사장을 반드시 초청해 달라고 요청해서 성사가 됐다는 것이다.
사람을 알려면 여행을 해보라는 말이 있다. 나이로 치면 김 회장이 나의 1년 선배이고, 10여 년을 알고 지냈지만 깊은 교류가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방문단이 집결하는 칠레까지 가기 위해 김 회장과 나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 마이애미로, 페루의 리마를 거쳐 칠레 산티아고로, 그리고 여객기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인 칠레의 푼타아레나스까지 단둘이 골프도 치고, 술도 마시고, 농담도, 담론도 하면서 우의를 다질 수 있었다.
내 느낌이지만, 언젠가는 같은 신문에서 일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을 만큼 김 회장은 나를 살펴보는 듯했다. “TBS 사장을 하며 방송에서 날려 봤으니 이제 신문에서 날려 보시면 어떻겠느냐”고 툭툭 던지는 특유의 말투로 내게 묻기도 했다. 나는 “신문은 아무래도 생소하고, 나는 기본적으로 방송인인 것 같다”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그리고 남극에서 돌아온 지 두 달도 안 돼 김 회장은 동아일보 대표이사 회장 겸 발행인이 됐고, 나도 KBS 사장으로 옮기게 됐다.
서울에서 떠나기 전에 나는 김 회장 부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같이 가게 돼서 다행이라며 꼭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했다. 약주를 많이 하는데 좀 못 하게 해달라며 홍 사장 말씀은 잘 들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여행 초기에 골프 치고 저녁 먹으면서 위스키를 많이 하기에 “김 형. 내가 부인한테 간곡한 부탁의 말씀을 들었는데, ‘재호 아버지 술 많이 드시지 않게 해달라’고 했다”고 그랬더니 김 회장은 눈을 껌벅거리면서 “그럼 그만할까” 했다. 그 뒤에는 남극 기지를 돌고 로스앤젤레스에서 해산할 때까지,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과음을 피하는 것이었다.
여행 도중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중 기억나는 것이 신문사 경영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한 대목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언론기본법’이 폐지되고 ‘정기간행물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28개 신문이 1995년 말 114개로 4배로 늘어날 만큼 무한 경쟁이 뜨거워지던 무렵이었다. 각 신문이 컴퓨터 제작 시스템(CTS), 데이터베이스 등 새 기술과 시설 투자 경쟁을 벌였고, 증면 경쟁은 물론이고 지방분공장 설립이나 현지 인쇄 계약이 심화되고 있었다. 자연히 제작 시스템과 조직 개편 얘기도 많이 나왔다.
김 회장은 중앙도 재정 상황이 어려울 텐데 어떻게 하려는가를 물었다. 나로서는 벼랑 끝까지 가는 자구책을 강구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래도 어려우면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김 회장도 경영이 어렵다는 말을 했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제일 필요한데 땅은 서울 양화동, 영등포, 그리고 지방에 어느정도 있다, 어디 사 줄 만한 곳이 있는지 알아봐 주면 크게 술 한잔 사겠다는 말도 했다. 중앙일보가 석간에서 버티고 있는데 조간으로 오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말도 해주었다.
남극에서 돌아온 뒤에도 한 달에 한 번쯤은 만나는 사이가 됐다. 주로 팔래스호텔 중국집에서 만나 짜장면과 탕수육에 배갈을 마시곤 했다. 돌아보면 언론사 오너로서 김 회장의 고뇌가 얼마나 컸는지를 절감할 수가 있다.
내가 볼 때 김 회장은 딱히 즐거움이라는 것이 없는 분이었다. 월급 받는 최고경영자는 그만둘 수도 있고 잘릴 수도 있지만, 그만둘 수도 없고 잘릴 수도 없는 것이 사주다. 그것도 김 회장은 3대를 잇는 사주이기 때문에 그 중압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경우에나 권력과는 거리를 두는 분이었다.
학자처럼 논리정연하지는 않아도 툭툭 던지는 듯한 그 특유의 스타일에서 나는 김 회장의 언론관, 경영관의 굵은 흐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언론의 사명에 대한 의식, 권위지로서의 최고의 신문 위상 유지, 또 3대에 걸쳐 이룩한 업(業)을 어떻게 지키고 발전시키느냐에 대해 고독하게 고심하고, 고뇌했다. 중앙일보가 돈으로 독자 확장을 해선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김 회장이 그렇게 힘들게 애쓰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어쩌면 그래서 술로 위로를 받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발렌타인 17년을 좋아하는 엄청난 주량도 그래서 쌓였을 것이다.
식사를 하다 어디선가 전화가 오면 김 회장은 오랫동안 경청을 했다. “그래, 자네 생각은 어때?” 묻고는 또 한참을 듣는다. 그러고는 “들어보니 자네 생각이 맞네.” 하는 모습이었다. 김 회장은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껴안고 가는 분이었다. 옳다고 믿는 일은 과감하게 밀어붙이지만 중요한 결정 사항을 앞두고는 신중하게 알아보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는 날카롭게 결정을 내렸다. 툭툭 던지듯이, 지나가며 찌르듯이 하는 말이 김 회장에게는 모두 의미가 있는 언행이었다.
어찌 보면 김 회장은 기인 같은 행적의 거인이었다. 대범하고, 과감하고, 소탈한 성품이어서 이분을 한번 알게 된 사람들은 자주 만나고 싶어 했다. 명문 집안 출신이지만 서민적인 풍모였고, 일상생활도전혀 호사스럽지 않았다. 신라나 롯데 같은 호텔은 공식 행사 아니면 출입하지 않았고, 사람을 만나는 데 지위나 신분도 가리지 않았다.
김 회장이 눈을 껌벅껌벅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하마가 연상된다.하마가 온순해 보이고 느리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은 초원에서 가장 무서운 맹수다.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악어도, 상어도, 사자도, 한입에 씹어 죽인다.
김 회장의 그 하마 같은 모습 속에 담긴 깊은 고뇌를 나는 보았다.그분은, 나는 사주 아니오, 사주가 흔들리면 신문 자체가 흔들리는 것이오, 했다. 어떤 경우든 근본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엉뚱하게 보이는, 기인 같은 사람이지만 의표를 찌르는 한마디를 툭툭 던지던 김 형. 보고 싶소.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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