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문
15일로 승전 21주년을 맞는 제1연평해전은 우리 군의 기념비적인 전투로 평가된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의 기습 포격으로 시작된 남북 함정 20여 척이 뒤엉킨 대규모 해상교전의 결과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북한군은 2척이 침몰하고, 3척이 대파됐지만 아군은 2척이 가벼운 손상을 입었다. 인명 피해도 극과 극이었다. 북한군은 선제 도발에도 수십 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11명 부상에 그쳤다. 많은 군 관계자들은 박정성 당시 해군 2함대사령관의 유비무환의 지휘력을 승전 요인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사령관 부임 직후 북한의 서해 NLL 도발을 직감하고 예하부대를 다잡았다. 매일같이 북한군의 전력 배치와 전술 분석, 실전을 상정한 고강도 훈련과 전술 토의가 이어졌다. 지휘관, 참모는 물론이고 병사까지 ‘열외’가 없었다. 일각에선 ‘사령관이 너무 몰아붙인다”는 불만이 나왔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기조와 결이 다른 일선 지휘관의 ‘강경 모드’에 대한 상부의 탐탁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치밀한 대비가 유사시 부하를 지키고, 작전에 성공할 수 있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가 실전에서 빛을 발했다는 게 군 관계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작금의 우리 군을 보면 당시 교훈은 잊은 듯 보인다. 곳곳에서 무사안일의 불안감을 자아내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유엔군사령부가 발표한 북한군의 아군 최전방 감시초소(GP) 총격 조사 결과만 봐도 그렇다. 유엔사는 북한의 의도적 도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우발적 오발’을 고수한 우리 군의 판단을 일축한 것이다. 과거 북한이 서해 NLL 등에서 우발을 가장한 도발을 일삼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군이 사건 초기부터 북한을 감싸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은 0.001%의 허점도 용납이 안 될 대비 태세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더욱이 적탄이 날아든 GP의 K-6 기관총이 고장 나 석 달 넘게 방치된 탓에 대응 사격이 지체됐지만 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다. 촌각에 생사가 갈리는 실전 상황에서 장병 목숨과 직결된 주요 화기의 허술한 정비 관리는 절대 어물쩍 넘길 사안이 아니다.
‘북한 눈치 보기’가 도를 넘은 것 아니냐는 비판도 군은 곱씹어봐야 한다. 지난달 북한이 국방일보에 보도된 해·공군 훈련을 비난하자 국방부가 보도 경위와 개선 방안을 문건으로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군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주요 민감 사안 홍보 시 BH(청와대) 및 관계부처 사전 협의 강화’라는 문건 내용은 북한을 자극하지 말라는 상부의 지침으로 해석될 소지가 크다.
군 내부에서조차 ‘코드 맞추기’라는 지적이 나오는 판국이다. 자칫 군의 사기를 꺾고, 북한의 도발 대응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9·19 남북 군사합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군의 안이함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본다. 남북 정상의 면전에서 체결한 군사합의를 설마 북한이 위반하겠느냐는 방심이 군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고서야 북한의 도발에 그 저의를 의심하기보다 이해하려는 군의 납득하기 힘든 태도를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북한군의 GP 총격이 합의 위반이 맞다면서도 과거보다 합의가 실효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군의 ‘궤변’도 이런 인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현 정부의 국방 기조는 ‘힘을 통한 평화’로 요약된다. 강력한 힘으로 평화를 뒷받침함으로써 남북 화해 기조를 가속화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 위해선 군이 어떤 위기 상황에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소신껏 맡은 임무를 완수할 수 있어야 한다. 군의 확고한 대비 태세야말로 북한의 도발 의지를 꺾고, 평화를 앞당기는 요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군도 평화무드가 부각될수록 방심의 유혹을 떨쳐내야 할 것이다.
지난해 서해 완충수역인 창린도에서 해안포 사격을 지휘하며 9·19 군사합의를 내팽개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근 핵·미사일 도발 재개를 위협한 상황에서 군은 더더욱 중심을 잡고 본연의 역할에 매진해야 한다. 북한이 도발해도 ‘선(先)조치 후(後)보고’ 원칙 대신 상부에 ‘쏠까요 말까요’를 먼저 묻던 관행에 젖어 실책을 자초했던 군을 국민들은 다시 보길 원치 않을 것이다.
윤상호 동아일보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