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金)씨 일가는 다 계획이 있는 것 같다. 김여정이 ‘대적(對敵) 사업’을 선언한지 3일 만에 보란 듯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시켰다. 옥류관 주방장까지 나와 막말을 쏟아냈다. 남한에 ‘삐라 벼락’을 퍼붓겠다는 일반인의 기고문도 노동신문에 실렸다. 일각에선 북한이 남한에 대해 대단히 화가 나서 이런다고 믿는다. 대북전단 살포도 막지 못했고 미국 눈치를 보느라 민족 간 사업을 용기 있게 추진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 뿐일까. 이들 중 일부는 북한은 내수가 튼튼하기 때문에 제재가 효과 없다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 경제가 어려우니 도와줘야 한다고 말을 바꾼다. 이렇게 파토스에 따라 로고스가 춤추는 이들의 말에 계속 한반도의 운명을 맡겨야 할까.
  

독재자는 단지 분풀이 할 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몇 년도 못 간다. 김정은이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을 연거푸 하다가 제재로 궁지에 몰리자 갑자기 유화·협상 모드로 돌변한 것을 보라. 국정 시스템이 없는 나라에서 독재자는 스스로 국면 변화에 유연하고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명도 보존하고 권좌도 지킬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이 노리는 이익은 무엇이며 이를 위해 어떤 전술을 쓰고 있는 걸까.
  
옥류관 주방장 등 보통사람이 프로퍼갠더에 대거 등장했다는 사실이 결정적 단서다. 평범한 자들의 눈으로 봐도 남한이 잘못했다는 식의 선전은 이번 도발의 일차적 목적이 대내용임을 암시한다. 일반 주민의 공감을 얻어 그 불만을 외부로 돌리겠다는 의도다. 그렇다면 이런 쇼를 해야 할 만큼 심각한 북한 내부 문제는 무엇인가. 당연히 제재에다 코로나 위기가 더해져 일어난 경제난이다.
  
2017~19년 3년 동안 북한 국민소득은 10% 가량 감소한 것으로 보이고 올해는 다시 5% 넘게 줄어들 조짐이다. 코로나 사태가 올해 내내 계속된다는 가정 하에서다. 이는 북한 역사상 최악이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 비해 절반 정도에 달하는 경제난이다. 한국이 겪었던 외환위기와 비교하면 2배가 넘는 충격이다. 자본주의는 통화와 재정정책으로 가계와 기업이 겪을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선 원래 통화정책이 없는 데다 현재 북한은 달러라이제이션으로 인해 통화증발도 어렵다. 정부 곳간을 채우기 위해 주민에게 국채를 강매하는 마당에 가계를 보호할 재정 여력이 있을 리 없다. 이는 북한 주민의 생활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가난할 때보다 형편이 나아졌다 다시 어려워질 때 더 큰 고통을 느낀다. 2010년 이후 광물 수출이 급증하자 주민 생활도 한결 좋아졌다. 그러나 국제적 제재로 대중 수출이 90% 이상 줄고 코로나 사태로 이제 수입까지 막히자 생활고가 가중되고 있다. 야자유 수입이 줄어들어 샴푸 제조에 넣지 못하니 머리카락이 엉켜 붙는 건 사소한 고통이다. 심각한 것은 식량이다. 올해 초 식량 밀수입마저 끊어지자 쌀값이 오르다 최근엔 오히려 하락했다. 반면 옥수수 가격은 올랐다. 이는 소득이 급감해 주민들이 쌀밥 대신 옥수수로 끼니를 대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 북한 주민의 불만은 고난의 행군 때에 버금갈지 모른다. 

김정은에겐 원래 다 계획이 있었다. 작년 연말까지 미국이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나오지 않으면 레드라인을 넘는 도발을 할 것처럼 말했지만 행동에 옮길 순 없었다. 북한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중국이 어떤 조치를 취할지 염려됐다. 더욱이 그가 다시 광인(狂人)처럼 행동한다면 아무도 그를 신뢰하지 않아 비핵화 협상은 더 어려워 질 것이다. 따라서 경제가 괜찮은 척하며 버티다가 2020년 미국 대선이 끝나면 본 게임을 치르는 것이 최선의 전술이었다. 급감하는 외환보유고가 걱정이었지만 그 때까진 지탱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코로나가 이 계획을 다 망쳐 버렸다.
  
김여정의 수는 미국에 주는 신호다. 문재인 정부 대북정책의 상징인 연락사무소를 아예 폭파한 것이 그 단서다. 만약 남한에게 조금이라도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면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김정은에겐 시간이 없었다. 하노이 회담 후 미국을 움직이려고 여러 차례 무력도발을 했지만 트럼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도발은 위험하다. 이러다 경제가 무너지면 대미 협상력마저 잃어버린다. 그래서 남한 대상 도발이라는 보다 안전한(?) 방식을 급하게 택했다. 과감한 실행력을 보여주면서 미국이 대선 직후라도 북한이 원하는 조건으로 신속히 협상에 임하지 않는다면 지금 남한과 비슷한 꼴을 당할 것이라는 으름장을 놓았다.
  
북한은 실제적 핵보유국 인정과 제재의 완전 해제를 위해 집요하게 움직인다. 우리는 북한의 수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나아가 북핵이라는 현실과 한반도 통합이라는 미래 사이에 견고한 교량을 놓아야 한다. 이 어렵고도 중요한 일을 북한 읽기에 줄곧 실패한 내재적 접근과 이에 기초한 민족 관점의 대북정책에게 맡길 수는 없다. 이념은 가고 실력의 시대가 와야 나라가 산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출처: 2020.06.24 중앙일보 중앙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