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문

제목[김병연] 완력의 정책, 부드러움의 정치

완력(腕力)이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대세가 된 듯하다. 반면 부드러움은 사라지고 절제는 외면된다. 염치는 없어지고 올바름은 무시된다. 이런 경향은 예전에 시작됐지만 최근에 더 심해진 것 같다. 여기엔 매사를 법으로 밀어붙이는 여당과 정부의 성향이 큰 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법은 정책의 최후 수단이다. 강제력은 자유를 훼손하고, 남용되면 공동체를 파괴한다. 국가가 완력으로 통솔하는 나라에선 국민이 불행하다.
  

현명한 정치인은 다양한 정책 수단을 골라 쓸 줄 알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수단을 사용해야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높을지 잘 알아야 한다. 사회과학은 법 외에도 세 가지 정책 수단이 더 있다고 가르친다. 넛지(nudge, 올바른 선택의 유도), 자치, 시장이 바로 그것이다. 모두 다 완력 없는 부드러운 개입이지만 강제성을 띤 정책보다 효과적일 때가 많다.
  
K-방역이 바로 넛지 방역이다. 동선 공개 등 은근한 압력으로 시민들이 사회적 거리두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대학교수가 한국의 방역 방법을 유럽에도 적용해야 한다며 필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필자의 답은 ‘잘 안 될 것’이었다. 신속한 검사와 추적, 치료 등 3T의 적용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자유와 자기 결정(自己決定)에 목숨 거는 서양인의 가치관 때문에 넛지가 작동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인을 비롯한 다수의 아시아 사람들은 자유보다 손익을 훨씬 더 중시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동조압력(peer pressure)에도 쉽게 순응한다. 이런 문화에선 광범한 봉쇄 없이 3T와 넛지로 코로나 사태를 안정시킬 수 있다. 이렇게 했을 때의 경제적 비용은 강제로 이동을 통제한 나라의 4분의 1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넛지로 성공한 정책은 많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미국 근로자의 퇴직연금 가입이다. 연금 가입을 법으로 강제하는 대신 넛지 경제학의 대가인 리처드 세일러의 자문을 받아 손쉽게 해결했다. 이른바 디폴트 옵션을 바꾸는 방법이다. 즉 과거에는 퇴직연금 가입을 원하는 근로자가 서류를 제출해야 했는데 새로운 방식은 자동가입을 디폴트로 하고 탈퇴를 원하면 서류를 작성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연금 가입률이 이전의 49%에서 86%로 증가했다. 이를 법으로 강제했다면 넛지 이상의 추가 효과는 크지 않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기회는 박탈됐을 것이다. 법 집행을 위해 공무원을 더 뽑고 세금을 올려야 했을 수도 있다.
  
건강한 사회는 정부의 물리력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물질력을 제어하면서 자치 단체의 자율로 공동선(共同善)에 도달하는 공동체다. 이를 위해 기관과 단체의 자치를 존중, 장려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효과적인 정책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은 정부 개입 없이 ‘공유지의 비극(경쟁적인 사익 추구로 공유자산이 황폐해지는 현상)’을 자체적으로 해결했던 다양한 사례를 분석했다. 공동체 구성원들 스스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조직을 만들어 이 비극을 피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정부나 시장이 아닌 제3의 지대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강력한 정부가 사문화된 법까지 들이밀며 탈탈 털면 자치는 질식한다. 정부의 눈치를 보는 영역은 확대되나, 시민의 자유로운 공간은 축소된다. 이런 나라는 점점 몰락한다.
  
시장을 이용한 개입도 있다. 만약 이 방법을 사용했다면 최근 공공 의대를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의료 접근성이 취약한 지역을 없애기 위해 공공 의대를 신설하고, 졸업하는 의사를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 취약 지역에서 일하게 하려 했다. 과연 이 정책이 최선일까.
  

경제학자 아서 피구는 오래전 이와 유사한 문제에 대한 답을 내렸다. 취약 지역 주민의 의료 접근성을 개선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면 법을 통한 강제력 없이 시장 친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의사가 부족한 지역의 의료수가를 적절히 올려주는 방안이다. 동일한 수의 환자를 진료하더라도 더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으니 취약 지역에서 개업하려는 의사 수가 증가할 것이다. 환자에게 더 관심을 쏟을 수 있어 의사로서의 만족감도 커질 것이다. 공공 의대 설립과 지원 금액을 의료수가 인상에 쓰면 되기 때문에 비용을 절감할 수도 있다. 만약 정치적인 목적으로 공공 의대를 설립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면 정부와 여당도 이와 같은 정책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완력의 정책은 가능한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전문성이 중요하다. 넛지 방역이 작동한 것도 전문가의 말을 경청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정책을 만들려면 먼저 공부부터 해야 한다. 당위만 읊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법을 제정하기 이전에 강제력을 쓰지 않고 효과를 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탐구해야 한다. 넛지 유닛을 설립하여 정책에 반영하고자 한 영국처럼 비(非)강제적 정책 개입을 연구하는 기관을 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실력자는 부드럽게 개입한다. 정치와 정책이 부드러워야 국민도 행복하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출처: 2020.09.16 중앙일보 중앙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