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문

제목[윤상호] 신뢰하되 검증하라

미소 냉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1985년 11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처음 만나 핵군축 협상의 물꼬를 텄다. 상대방을 수백 차례나 절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 경쟁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두 정상은 핵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결코 핵전쟁을 벌여선 안 된다는 선언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후 협상은 결렬과 파행으로 점철됐다. 미소 간 불신과 반목의 벽은 예상보다 훨씬 두껍고 높았다. 양측은 레이캬비크와 워싱턴으로 이어지는 ‘핵담판’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레이건에게 ‘스타워스 계획’으로 불렸던 전략방위구상(SDI)의 선(先)포기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미국이 군사위성과 레이저로 핵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게 되면 소련의 핵무기는 고철이 되고, 군비경쟁 심화로 체제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반면 레이건은 이를 대미 핵전력 우위를 노린 기만전술로 보고, 조건 없는 핵감축을 수용하라고 고르바초프를 압박했다. “왜 날 못 믿느냐”고 고르바초프가 항변할 때마다 레이건은 ‘신뢰하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는 러시아 속담으로 응수했다. 소련의 진정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어떤 합의도 없다는 원칙을 레이건이 고수한 끝에 양측은 1987년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했다. 이 합의가 냉전 종식의 서막이자 인류 파멸의 핵시계를 늦추는 기폭제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교훈은 30여 년이 흐른 작금의 북핵문제와 남북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2년여간 정상회담 이벤트로 점철된 ‘한반도 데탕트’가 북한에 핵무장을 강화할 시간만 벌어준 ‘속빈 강정’으로 판명 났기 때문이다. 남북, 북-미 정상이 만날 때마다 화려한 미사여구가 넘쳐났지만 북한의 핵은 더 고도화됐고 김정은의 비핵화 약속도 공약(空約)으로 드러났다. 지난달 북한이 당 창건 열병식에서 세계 최대급의 ‘괴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공개하는 한편 영변 등 핵시설 곳곳에서 우라늄 농축을 진행 중인 것이 그 증거다.


이쯤 되면 북한은 애당초 비핵화에 관심이 없었고, 앞으로도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제로(0)’라고 보는 게 합리적 추론이 아닐까. 북한의 비핵화 주장을 철저하게 검증하지 않고서 진행한 비핵화 협상은 더 심각한 후과를 예고하고 있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장착한 신형잠수함과 다량의 핵탄두를 보유한 ‘핵깡패국’이 휴전선 지척에 등장할 날이 조만간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진의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현 정부의 대북정책도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 9·19 남북군사합의를 맺고도 김정은 주도로 완충수역에 포격을 하고, 탄도미사일 연쇄도발을 강행하는 한편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북한이 합의 내용과 정신을 위반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격 사건도 바다에 표류 중인 우리 국민을 북한이 설마 사살하겠냐며 군이 방심하다 허를 찔린 격이다. 어떤 합의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북한의 태도가 전혀 변치 않았음을 간과한 정부의 책임이 크다.


적의를 가진 상대국의 말만 믿고서 검증과 사후 대비에 소홀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 역사는 똑똑히 증명한다. 북한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감성적 민족팔이’로 포장된 북한의 유화 공세에 한국이 취해서 방심하는 순간 어김없이 대남도발로 귀결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남북관계의 경험칙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 전술로 핵위협 증강에 몰두해 온 북한을 순순히 신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정부 여당은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의 출발점으로 종전선언을 거론하면서 대북 구애(求愛)에 갖은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나친 대북 저자세라는 비판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북한의 진정성이 검증되지 않는 한 종전선언이 아니라 그 어떤 거창한 선언도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는 북한과의 대화 복원에 매달리기에 앞서 비핵화를 위한 전향적 태도 변화부터 북에 촉구하고 이를 검증하는 작업에 나서길 바란다. 북한에 대한 검증 없는 신뢰를 고수하는 것은 대한민국 안보와 한반도 평화에 독이 될 뿐이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