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문

제목[박철희] 韓·日이 다투면 北·中은 어부지리

올해는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 지향적 양국 관계를 열기로 약속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양국은 약속을 팽개친 채 역주행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를 직시하지 않고, 한국은 미래를 열 의지가 없다. 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해 한국 위안부에게 사과 편지를 쓸 의향이 있느냐는 국회 질문에 ‘털끝만치도 없다’고 답했다. 사과는 위안부 합의에 쓰인 문서로 종결됐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잊을 만하면 다시 과거사 문제를 꺼내 들고 일본을 괴롭힌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선 일본에 대해 ‘사과 부재 피로’가 있고, 일본에선 ‘거듭된 사과 요구 피로’가 만연하다.


최근의 한·일 관계는 과거사의 포로가 된 특수한 관계를 넘어서서 서로가 상대방을 무시하고 전략적으로 방치하는 비정상적인 사이로 전락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연례적으로 해오던 한일의원연맹 총회 인사말조차 건네주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판결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해외에서 일본과 가까운 지식인들에게 정부 홍보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위안부 합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데 이어, 국제관함식에서 욱일기 게양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화해와 치유재단 해산을 결정하고, 강제 노동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 문제에 대한 논란들을 먼 산 불구경하듯 하고 있다. 한·일 양국 모두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비우호적 국가를 다루는 방식들에 가깝다.


전략적 방치는 상대방에 대한 오해와 불신, 그리고 상대국의 전략적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데서 기인한다. 일본은 한국이 국제적인 약속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국내 상황이 바뀌면 조약의 해석도 뒤집는다며 법의 지배와 민주주의가 존중되지 않는 나라라고 비판한다. 한국의 저항적 시민사회의 강인함, 민주주의의 과잉, 삼권분립의 엄중함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한국은, 전후 세대가 중심이 된 일본의 지도층이 과거사에 대한 부채의식이 약한 반면, 국제법에 대한 존중이 우리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한·일 양국 지도부는 북한 핵 문제 해결과 경제위기의 돌파를 위해 서로가 협력해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 정부 당국자들은 일본이 북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긴커녕 납치 문제만 제기하는 외골수로 본다. 주일미군과 유엔사의 협력, 일본 자위대의 후방 지원이 있어야 한국 안보가 확보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이 너무 많다. 튼튼하고 활력 있는 한국의 존재가 일본의 안보 이익과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일본도 애써 눈을 감는다. 안보 협력과 경제 연계의 이점들은 오로지 이것들을 잃어버렸을 때만 깨닫는다. 상호 전략적 방치가 위험한 까닭이다.


한·일이 다투면 어부지리 하는 쪽은 북한과 중국이다. 북한은 우리 민족끼리 합쳐서 반일 투쟁을 강화하려 한다. 한·일을 격리시켜서 얻는 이익이 손해보다 많기 때문이다. 한·일이 스스로 멀어지면 중국은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 된다. 일본은 오히려 한국이 방심하는 사이 중국과 뒤로 손을 잡았고, 북한과도 소통을 높여가고 있다. 미국은 좌불안석이다. 비핵화보다 남북관계 개선에 열을 올리는 한국이 일본과 툭탁거리기까지 하면, 미국도 한국을 방관하는 결과를 부를지 모른다. 미·북 대화가 진전 안 되고 한·중 관계는 어정쩡한데 한·일 관계가 삐걱거리면서 한·미 관계에도 잡음이 커지면 한국은 남북관계도 진전시킬 수 없다. 한·일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이유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