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문
좌파세력의 한미동맹 파괴활동
남시욱(화정평화재단 이사장)
한국 좌파세력의 특징
한국의 좌파세력은 서유럽 일본 등 선진국들의 좌파세력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한국의 좌파세력 중에는 자기 나라를 부정하고 해치는 반국가적인 세력이 있는 점이 그렇다. 이들은 대부분 종북세력이다. 북한공산정권의 폭정에 견디다 못해 대한민국으로 넘어오는 탈북민들의 수가 해마다 늘어나 현재 3만 명에 달하는데도 이들 종북세력은 불가사의하게도 무조건 북한이 좋다고 한다.
종북세력이 존재하는 근본이유는 한반도가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분단국가였던 독일의 경우는 달랐다. 과거 동서독 병립시대에 동독에서 장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해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드물었다. 이에 비해 또 다른 분단국가인 베트남의 경우는 달랐다. 남부 월남은 정치불안과 부패가 심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6개국의 군사지원에도 불구하고 베트콩의 끈질긴 전복활동과 월맹 정규군의 진격으로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한국의 반국가적인 좌파세력은 해방직후에 결성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그 후신인 남로당이 그 뿌리이다. 이들 좌파세력은 6‧25전쟁을 계기로 거의 소멸되었으나 1960년대에 들어 지하조직의 형태로 부활했다. 북한으로부터 공작원들이 남파되어 오기도 하고, 남로당의 잔존세력이 비밀리에 조직을 재건하기도 했다. 이들 좌파지하세력의 대표적인 예가 1970년대 말의 통일혁명당 사건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자신이 존경한다고 공언해 물의를 빚은 신영복은 통일혁명당의 군사책임자였다.
한국의 종북세력은 대개 북한과의 평화통일을 내세우기 때문에 선의의 평화통일논자들과 혼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 반국가적 좌파세력의 실제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면 속내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제도를 근본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파괴와 소멸을 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국가적 좌파세력의 통계가 없어 그 규모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주한미군철수와 맥아더 동상철거를 주장하는 세력과 제주 해군기지와 성주 사드기지 건설을 반대하는-순수한 지역주민들을 제외한-직업적 좌파활동가들과 사법부가 정식으로 반국가단체라고 판결한 종북단체 소속원들이 반국가적 좌파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2007년에 출범한 한국진보연대는 국내의 좌파세력 지도자들을 총망라한 단일조직이다. 한국진보연대는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 학생 등 여러 계급과 계층별 대중 조직들 및 진보정당 등 총 37개 단체가 가입한 좌파진영의 단일 연합체이다.
이 단체의 상당수 간부들은 실정법 위반 경력의 소지자들이다. 박근혜 탄핵운동에 앞장섰던 이 단체의 주요임무는 주한미군철수운동이다. 한국진보연대는 출범 당시 한미 FTA 저지, 비정규직 철폐,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 4대 과제를 내걸었다. 이 4대 과제 중 비정규직 철폐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3대 과제들은 모두 외교 안보정책과 관련된 분야들이다. 현재 한국진보연대의 10개항 강령 중 제1항이 제국주의적 지배정책 반대와 나라의 자주권 쟁취로 되어있다.
좌파학생들의 경우, 1980년대의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 이어 1990년대의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대표적인 반국가 학생운동조직이다. 한총련은 나중에 대학생들의 외면을 받아 PD(평등파)계열이 NL(민족해방파) 주류파로부터 떨어져 나가 전국학생회협의회(전대련)을 결성했다. 그러나 곧 NL계열의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이 결성되어 이들은 2017년 10월 트럼프 미국대통령 방한반대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심지어는 트럼프 참수경연대회까지 개최했다. 이 같은 끔직한 행사를 개최하는 저의는 미국의 여론을 자극해 주한미군을 스스로 철수시키려는데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2005년 4월 출범한 한대련은 한 때 20여개 대학의 총학생회를 거느렸는데 한대련의 11기 회장을 지낸 김모 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요즘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한진련)을 이끌고 있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한진련은 박근혜 탄핵 1주년을 맞은 2018년 3월 10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출범했다. 이들은 출범에 즈음하여 “새로운 봄,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서 우리 대학생들도 함께 나아가야 할 때”라고 주장하면서 “평화의 길, 통일의 길, 적폐청산의 길, 그리고 대학생문제 해결의 길로 더욱 달려 나가야”한다고 선언했다.
한진련이 그동안 1년여에 걸쳐 수행한 활동은 국민들의 큰 우려를 낳았다. 이들은 작년 10월부터 연말에 걸쳐 국민주권연대 등 12개 단체와 협력해 백두칭송위원회이니 위인맞이환영단이니 하는 이름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서울방문 환영모임을 만들어 세종로 일대에서 춤추고 노래를 했다. 한진련은 작년 11월 초 경기도 평택 미군기지에 들이닥쳐 “한반도 내정간섭 일삼은 주한미국사령관 지명자 로버트 에이브럼스는 사과하라” “한반도평화 방해하는 주한미군 철수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한진련은 올해 들어 지난 2월에는 김정은 연구모임을 발족시켰다. 이 모임은 “김정은이 왜 위인인가”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열었다. 발표자들은 김정은이 "북한의 모든 주민에게 크나큰 지지를 받고 있다"느니 "사랑과 믿음의 정치를 펼친 세심함" 이니 하고 칭송을 했다. 이들은 또한 김정은이 한 말을 가사로 해서 작곡한 노래도 불렀다. 이들은 같은 시기에 서울 세종로 일대, 특히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국민주권연대 및 청년당과 함께 “한반도 평화통일을 방해하는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
한진련은 지난 4월에는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4층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의원회관사무실에 쳐들어가 “반민특위 망언 나경원은 사퇴하라”, “김학의 성접대 사건 은폐 황교안은 사퇴하라”, “세월호 진실 은폐주범 황교안은 사퇴하라” 등의 팻말을 들고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회장 김모 군 한 사람에 대해서만 검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법원은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이를 기각했다. 한진련은 또한 같은 시기에 자유한국당 경기도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하고, 자유한국당 해산을 주장하는 시위를 청와대 앞에서 벌이기도 했다.
한진련의 가장 최근의 움직임으로는 지난 6월 15일 6.15 남북공동선언 19주년을 맞아 서울 신촌에서 개최한 통일한마당 행사였다. 이 행사에서는 남북정상회담 사진전, 통일을 바라는 한마디 적기와 한반도 버튼 판매, 북한 물품 박람회, 대동강맥주를 먹고 싶은 소망을 담은 맥주 나눔, ‘분단적폐 쏘기’, 자유한국당 비판행사 등 총 8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분단적폐 쏘기’ 프로그램은 장난감 총으로 트럼프, 나경원, 황교안, 대한애국당 등을 쏘아 넘어뜨리는 행사였다. 이날 오후에는 6·15 통일문화제를 열고 대학생들의 연설과 노래, 춤 공연 등으로 지나가는 시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참가자들은 그 후 장소를 광화문으로 옮겨 6·15 19주년 민족자주대회에 참여했다. 같은 날 부산에서도 ‘통일, 멀다고 말 하면 안되겠구나’, 춘천에서는 ‘6·15 강원도민 통일 문화제’, 광주에서는 ‘6·15 남북공동선언 19주년 청년학생대회’라는 이름으로 6·15 남북 공동선언 19주년을 기념하는 문화제가 개최되었다.
3대혁명 역량과 남한의 친북세력
북한정권은 한반도의 공산통일을 위해 3대 혁명역량의 강화라는 중요한 전략을 갖고 있다. 이미 1964년 2월부터 북한당국은 이를 강조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북한의 혁명역량, 남한의 혁명역량, 그리고 국제적 혁명역량 세 가지이다. 북한의 혁명역량이란 적화통일에 필요한 북한 자체의 군사력 외교력 등 힘을 의미하고, 남한의 혁명역량은 북한의 도움으로 남한에서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지하조직의 힘 등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앞에 소개한 한진련 같은 학생단체가 남한의 혁명역량에 들어간다. 국제적 혁명역량은 한반도의 적화통일에 유리한 국제적 여건을 만들어 내는 여론과 지지세력을 의미한다.
북한의 대남전략에서 중요한 남한의 혁명역량 강화를 위해서 북한 당국은 남한 사회의 노동자 농민 학생 등 혁명을 이끌 계층을 양성한다. 이들은 결정적 시기가 오면 ‘남조선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모든 힘을 발휘한다. 남한의 혁명역량 문제는 6·25전쟁 이전에도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김일성이 1949년에 남한을 침공하려 하자 모택동은 이를 말리면서 남한의 게릴라부대를 활용할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전쟁직전인 1950년 4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김일성, 그리고 박헌영이 한자리에 앉아 남침작전을 논의할 때 박헌영은 만약 북한의 인민군이 서울만 함락하면 남한에서 활동하는 빨치산부대가 사흘 안에 나머지 지역을 해방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박헌영의 ‘좌경모험주의’ 때문에 과도한 빨치산활동을 벌여 ‘혁명역량’을 희생시킨데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휴전이후 김일성이 박헌영을 처형하는데 중요한 구실로 이용되었다.
‘외교의 신’이라는 이승만 박사의 한미동맹 결성 공로
김정은은 2017년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을 맞아 미국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급인 화성 14형의 발사 실험에 성공했다. 이로써 북한은 사실상 핵무기 개발의 완성단계에 이르러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시간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북핵의 이른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CVID)를 위한 대북협상이 성공하리라는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 김정은의 평화공세를 액면 그대로 믿고 남북관계 증진에만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북핵에 대한 궁극적인 대안은 북한의 ‘레이짐 체인지’를 이룩하거나, 아니면 한국도 자체 핵개발을 하든지 미국의 핵을 재배치하는 길 외는 없을 것이다. 그 어느 경우든 긴밀한 한미동맹 관계는 중요하다.
한미동맹의 근거가 되고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외교의 신’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외교력 덕분에 체결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이 휴전협정 교섭을 시작하자 한반도 통일 이전에 휴전을 하는 것은 제2의 6·25전쟁을 부르는 행위라고 강력 반대했다. 그는 휴전협상을 깨기 위해 휴전회담에 정부대표를 보내지 않고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실력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국정부의 방침이 바뀌지 않자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의 조건으로 한미동맹의 결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그 대신 1951년 12월 20일 국가안보회의에서 휴전협정 체결이후 공산측이 다시 한국을 침략할 경우 무제한 응징한다는 NSC 118/2호 계획을 입안해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 이승만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휴전을 반대했다. 결국 트루먼 행정부는 1952년 휴전 협상 마지막 단계에서 그를 체포해 제거하는 이른바 ‘에버레디작전’을 수립했다.
그런데 휴전협정 체결 약 2개월전인 1953년 5월 29일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당시는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이다. 이날 워싱턴에서 열린 국무부 합참 연석회의에서 그 동안 미국정부 특사로 이승만 대통령과 휴전문제를 협상을 하던 국무부 차관보 월터 S. 로버트슨의 발언 한 마디로 사태가 급변했다. 그는 회의 도중 발언권을 얻어 폭탄선언을 했다. 그는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한국 정부를 접수합니까? 정녕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입장으로 몰고 가고 싶은 겁니까?”하고 이승만 체포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이승만이 요구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방법 외는 없다는 것이다. 그의 용기 있는 발언으로 에버레디작전은 중지되고 이승만 박사가 그렇게도 바라던 한미동맹 결성 쪽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이 급선회한 것이다. 마침내 미국의 한미동맹 결성 방침이 한국정부에 통고되고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하게 된다.
휴전협정 조인 직후인 1953년 8월 8일 경무대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이 거행되었다.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국무장관이 조약에 서명했다. 변영태 뒤에 서서 가조인 행사에 입회한 이 박사는 곧 특별담화를 내고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며....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대한민국은 곧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끝>
<출처 : 한미우호협회 발행 ‘영원한 벗들’ 2019-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