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우리 아이들의 & 아름다운 한반도)
북한이 비밀 미사일 기지 13곳을 계속 운영해 왔다는 증거가 제시됐습니다. 세계적인 싱크탱크인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위성사진 판독 결과를 뉴욕타임즈가 12일(현지 시간) 보도하면서 파문이 커지고 있습니다.
CSIS측 책임연구자는 북한군사전문가인 조셉 버뮤데즈와 북핵과 협상전문가인 빅터 차 한국석좌(Korea Chair)입니다. 차 교수는 주한미국대사 지명을 받았다가 코피작전(bloody nose)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전격 철회된 대북 강경파 학자죠.
내용은 명료합니다. 북한이 황해북도 황주군 삭간몰 등 13곳 에서 미사일 기지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삭간몰은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135km 떨어진 곳에 있고 현재 GP 철수 작업이 진행 중인 비무장지대(DMZ)에서는 불과 85km 거리에 있습니다.
▶CSIS 자료(https://beyondparallel.csis.org/undeclared-north-korea-sakkanmol-missile-operating-base/)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미사일 기지이고 2016년 3월, 7월, 9월에 8발의 중·단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한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기지로 운용되고 있지만 준중거리탄도미사일(MRBM) 발사장소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 CSIS의 판단입니다.
자 이제부터 미국이 공개한 위성사진이 뭐가 문제인지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북한 황해북도 황주군 삭간몰 미사일 기지의 위성사진. 사진 촬영시기는 올해 3월 29일로 명시돼 있다. (사후적으로 취재해 본 결과 삭간몰 미사일 기지는 최근 위성사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쟁점1: 북한이 속였나?
위성사진까지 공개된 마당이니 일단 삭간몰에 해당 군사시설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NYT는 “북한이 그동안 거대한 기만전술(great deception)을 써 왔음이 드러났다”고 논평했습니다. 기만이라고 주장한 근거는 6월 12일 있었던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에서 내놓은 공동성명과 김정은 위원장의 구두약속입니다. 당시 북-미 정상은 싱가포르에서 4개항의 합의문을 내놨고,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의 대화 등을 토대로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제거됐다”고 선언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발표한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하에 영구적으로 폐기(5조 1항)하기로 했고, ’미국이 6.12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조치를 취해나갈 용의가 있다(3항)고 했습니다.
앞서 폭파한 동창리 핵시설과 함께 동창리 미사일기지, 영변핵시설 폐기 등을 약속하면서 뒤로는 딴 짓을 했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입니다.
◇쟁점2: 아무것도 아니다?
언론보도가 있자 청와대는 13일 오전 ‘서둘러’ 브리핑을 했습니다. 김의겸 대변인의 설명 중 중요한 내용을 추려봤습니다. (거두절미 했다고 할까봐 가급적 원문 그대로 소개 드립니다.)
“일단 CSIS에서 낸 보고서 출처는 상업용 위성이다. 한미정보당국은 군사용 위성을 통해 훨씬 더 상세하게 이미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면밀하게 주시중이다. 새로운 건 하나도 없다.”
“기사 내용 중에 기만,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또한 북한이 이 미사일 기지를 폐기하겠다 약속한 적이 없다. 미사일 폐기 조항 의무조항인 어떤 협정도 맺은 적이 없다. 기만은 부적절 표현이다. 오히려 이런 미사일 기지 있다는 자체가 협상을 조기에 성사해야 하는 필요성 보여주는 것이다. 미신고 표현도 나오는데 마찬가지다. 신고해야 할 어떤 협상, 협약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표현을 내용이 귀에 거슬립니다. 더구나 미국 언론이 민간 싱크탱크 자료를 인용해 한 보도를 청와대 대변인이 나서서 적극 해명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은 어색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9월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을 들은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이 “사실상 김 위원장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까지 내놨던 터라 대변인의 발언은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입니다.
◇쟁점3: 2002년 데자뷔?
이번 사건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까요? 김의겸 대변인의 표현대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끝날지, 아니면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 협상에 결정타가 될지는 두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2000년부터 남북관계와 북핵협상을 취재해 온 기자에게는 2002년 이른바 고농축우라늄(HEU) 사태와 2차 북핵위기가 오버랩 됩니다. 당시 우리는 김대중 정부 시절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북한과 협상을 했던 빌 클린턴 정부에 이어 2001년 집권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 정권은 협상에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미국 정부당국은 북한이 제네바 합의(1994년)를 무시한 채 플루토늄이 아닌 우라늄농축기술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북한을 방문해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의 면전에서 이 문제를 따져 물었고 강 부상은 “우리는 고농축우라늄 보다 더한 것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쏘아 붙였습니다.
미국은 북한이 전 세계를 속였다(cheat)며 사실상의 제네바 합의 파기를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2차 북핵위기입니다.
평양을 방문하고 중국 베이징으로 나온 제임스 켈리 전 미국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베이징 숙소에 도착하고 있다. 2002년 10월.
◇청와대의 메시지 관리
물론 이번 미사일 기지 사태가 16년 전의 참사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간에 여전히 우호적인 흐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이번에 ‘적발’(?)된 시설이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두고 있지 않은 중단거리 미사일이라는 점에서 미국이 대단히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13일 오후까지(한국 시간) 공식적인 논평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청와대가 발신하는 메시지는 국제사회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국내의 보수적인 시각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 대변인의 논리를 따른다면 2002년에도 북한이 HEU를 폐기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주장은 지금 현재의 북핵상황을 보면 얼마나 심각한 궤변이 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해외순방에 나서는 청와대는 “이런 북한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협상과 대화의 필요성을 더 부각시키는 사실관계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대화가 중요하고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서둘러 추진하고 싶어도 이건 정도가 아닙니다.
북-미관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남북관계의 발전에도 과연 이 행동이 어울리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판문점에서 GP를 철수하고 서해를 평화수역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마당에 군사분계선에서 1시간 남짓 한 곳에서 미사일 기지를 계속 운용하고 있다니요?
최고급 제주감귤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군용기로 가져다 준 문재인 정부입니다. 북-미 핵협상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속인데 한라산 백록담에 김정은 위원장을 태운 헬기가 무사히 착륙할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악행’마저 모두 감싸고돌면 김 위원장이 감동해 서울에 올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면 우리가 목표로 하는 북한 핵무기 제거와 한반도 평화정착이 앞당겨 질까요?
하태원 채널A 보도제작팀장(부장급·정치학 박사수료)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