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 아태 지역에도 영향
엄구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기축 통화인 달러의 횡포 때문에 루블화의 가치가 하락했다는 피해의식을 가진 러시아가 원자재를 레버리지로 벌이고 있는 경제 전쟁의 성격도 있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앞으로 국제경제에서는 경제 안보가 전통 안보 못지않게 중요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처럼 얼마나 싸게 공급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신뢰를 얻고 공급을 받을 수 있느냐의 경제안보 질서가 중요해 질 것이라는 것이다. 공급망에서 가격보다 신뢰가 핵심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엄 교수는 러시아가 동부 돈바스 지역을 점령한 뒤 영토 분할을 선언한 채 협상이 결렬되면 우크라이나 사태는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다며 그럴 경우 미국의 대중 견제 인도-태평양 전략의 추동력은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먹구름이 짙어지고 쉽게 걷히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전봉근 국립외교원 교수는 고대 그리스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주요 경쟁 도시인 아테네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동맹 관계였던 멜로스의 보호를 포기했다며 강대국 사이에 놓인 ‘낀 국가’의 비극과 운명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도 역사적으로 명분과 전통을 중시한 나머지 침략과 항복의 굴욕의 역사가 이어져왔다. 19세기 이후 해양세력과 대륙세력간의 지정학적 경쟁에 끼여 전쟁, 점령, 분단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국에 주는 교훈은 ‘낀 국가’는 지정학적 역사적 정체성, 국가역량, 지정학적 환경에 맞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점이다. 강대국의 명분없는 침략전쟁은 소국의 명분있는 국민적 저항에 번번이 무산된 것이 전쟁사를 통해 보여주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자강(自强)에 힘쓰고, 국론 합의에 기반을 둔 일관성 있는 외교정책이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영토 보존은 모든 중소국, 끼인 국가들에게 공통된 가치이자 이익이라고 말했다.
● 우크라이나 사태, 북핵에도 악영향
엄 교수는 “러시아가 유럽에서 서구와의 대결에서 직면한 전략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균형수단으로 동북아에서 북한과의 전략적 제휴를 강화하면 북핵 해결에서 한러간 협력의 공간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장덕준 국민대 교수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핵과 미사일 무장을 강화하고 있는 북한에 안 좋은 시그널을 주었다며 대북 핵정책에 대한 변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도 강조한 한미 동맹 강화에 기초한 대북 확장억제에 ‘전술핵 무기 반입’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한반도 전술핵 반입이 북한에 대한 비핵화 요구와 모순된다는 반론이 강하지만 북한은 이미 핵 보유국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고, 북핵 강화에 따른 독자 핵무장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했다.
장세호 국가전략연구원 연구위원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금까지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한반도에서의 전면 전쟁도 놀랄 일이 아니게 됐다고 우려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일본은 재무장과 보통국가화를 위한 기회로 삼기 위해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고,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에 따른 고립에서 탈피하고 대북 압박을 분산하는 기회로 삼고 있다고 했다.
전 교수는 과거 우크라이나가 ‘부다페스트 각서’ 등을 통해 핵을 포기한 것이 옳았냐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당시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의 최대 과제는 국제사회의 인정이었는데 최대의 장애는 핵 보유였다. 당시 국제사회의 인정 속에 강대국으로부터의 안전 약속과 경제적 지원을 받는 대신 핵을 포기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정체성과 국가적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핵 개발에는 성공했으나 경제와 국가발전 전략은 실패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고립과 제재를 당하고 있는 북한에게 과거 우크라이나의 선택, 즉 비핵화의 길이 없다고만 할 수 없다. 북한은 비핵화에 앞서 먼저 핵동결을 요구할 수도 있다. 전 교수는 이런 맥락에서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북한 비핵화를 위한 노력을 멈출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