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남한군은 북한에 남침할 용기를 줬다” 맥아더의 비판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1회] ‘미국 불개입’ 오판(誤判)이 부른 6·25 전쟁 (上)
공격개시 = 전화음어 ‘폭풍’ / 무전 ‘224’
발포개시 = 전화음어 ‘폭풍’ / 조명탄 ‘적색’ / 무전 ‘333’
발포개시 = 전화음어 ‘폭풍’ / 조명탄 ‘적색’ / 무전 ‘333’
6·25 전쟁 개전 후 입수한 북한 ‘전투명령 1호’에서 드러난 작전명은 ‘폭풍’이었다. 북한군은 암호처럼 전격적으로 옹진반도~개성~동두천~포천~춘천~주문진을 잇는 38선에서 새벽 4시 일제히 포격을 개시했다. 비슷한 시각 강릉 남쪽 정동진과 동해 남쪽 임원진에서는 북한군 육전대와 유격대가 ’순조롭게 상륙’해 동부 전선 8사단의 퇴로를 막았다. (소련 스티코프의 6월 26일자 전문). 하루 전날 평양방송이 “내일 오전 중 중대 방송이 있다”고 남침을 예고한 것처럼 25일 오전 11시 “북침을 해왔다”고 허위 선전을 했다. 북한은 6월 조만식 선생과 이주하 김삼룡을 교환하자고 평화공세를 폈는데 이는 전쟁 개시 직전 연말술이었다.
휴전까지 1129일 동안 민족과 국토에 길고 크고 깊은 상처를 남긴 6·25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동아일보 1950년 6월 26일 1면
동아일보가 1950년 6월 26일 1면 머릿기사로 ‘북괴군 돌연 남침을 기도’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25일 당일에는 전쟁 발발을 알리는 호외를 수차례 뿌렸고, 27일자까지 발행한 뒤 잠시 휴간했다.
비상해제 휴가 외출 외박으로 최전방 구멍 숭숭
분단 이후 산발적으로 무장 충돌이 계속되어 왔지만 그해 상반기에는 유난히 전군 비상 경계령이 잦았다. 4월 11일, 5월 8일에 이어 6월 11일 세 번째 내려졌던 비상 경계령은 24일 0시 해제됐다. 장기간 경계령 발령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누적과 농번기까지 겹쳤다. 춘궁기를 맞아 군부대 알곡이 거의 떨어진 것도 한 요인이었다. 중부전선 6사단은 3월에 비상식량이 하루치였다고 한다. (남도현, 85쪽).
6월 10일 군인사로 전후방 전체 8개 육군 사단 중 5개 사단장이 바뀌었는데 전방 4개 사단장은 모두 교체됐다. 비상 경계령 해제로 전방부대 휴가 외출 외박 병력이 전체의 30%에 달했다. 북한군 주력 1군단이 내려온 의정부와 포천을 담당하는 국군 7사단은 더 높아 비율이 40%였다. 북한군 1군단의 3사단과 4사단, 105전차여단과 국군 7사단만을 보면 병력 차이는 7 대 1, 화력까지 계산하면 18대 1 정도로 열세였다. 전방 4개 사단 중 7사단이 가장 먼저 무너졌다.
당시 유재흥 7사단장은 부임 후 철원 쪽에 적의 신예 전차 부대가 집결 중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부대에는 대전차 지뢰도 없었다. 육군본부에 호소했으나 미 고문관들은 “한국 지형은 전차가 활동할 수 없으니 겁낼 것 없다. 2.36인치 로켓포가 어떤 무기냐”고 일축했다. 북한이 소련제 T-34 전차를 몰고 내려왔을 때 2.36인치 로켓포는 무용지물이었다. (유재흥, 113쪽).
의정부시 자일동의 옛 축석령 고개길에 있는 ‘포병용사 김풍익 전투기념비’는 몸을 던져 북한 전차를 막아야 했던 절박한 상황을 보여준다. 축석령 고갯길은 지금은 43번 국도에서 벗어나야 갈 수 있는 승용차 2대가 비켜가기에도 좁은 길이다. 7사단이 붕괴된 후 긴급 투입된 포병학교 교도2대대(김풍익 대대)의 김풍익 소령과 장세풍 대위 등은 곡사포를 직접 조준해 발사하기 위해 북한군 전차 50m까지 접근했다. 이어 전차 캐터필러를 파괴해 주저앉힌 뒤 두 번째 포격을 하려다 적 후속 전차의 포격으로 사망했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은 뒤 3일만에 서울이 점령됐으나 김풍익 소령처럼 몸을 던지는 투혼으로 조금이나마 진격속도를 늦췄다.
경기 의정부시 자일동 옛 축석령 고갯길에 1988년 ‘포병용사 김풍익 전투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 앞에는 김풍익 중령부터 이종현 일병까지 결사대 11명의 전사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950년 6월 24일 밤 용산 육군참모학교 구내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파티가 열렸다. 50여명의 고위 장성이 참석했고 밤 10시경 끝났다. 10여명의 육군본부 및 미 군사고문단 장교는 명동 카바레로 2차를 가서 이튿날 새벽 2시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김인철, 110쪽).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24일 동두천과 포천, 개성 지구에 정보장교들을 급파해 25일 오전 8시까지 보고토록 했다. 그만큼 북한 동향이 심상치 않았다는 것을 느끼던 때였다. 하지만 정작 채 총장은 용산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파티에 참석해 이튿날 새벽 2시에 귀가했다. (백선엽 2권, 175쪽)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조형물 ‘멈춰진 시계’가 개전 시각을 알리듯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멈춰있다. 구자룡 기자
미국, 한국의 전략적 가치 저평가
미국 전쟁부는 1947년 4월 미국 국가안보의 중요성에서 한국이 원조 대상 16개국 중 13위라며 국무부에 주한미군 철수를 건의했다. 미 합참도 그해 9월 국무부에 “한국에 군대나 기지를 유지할 전략적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고 통보했다.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은 1948년 3월 미국은 미드웨이 제도, 알류산 열도,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 오키나와 등을 포함하는 U자형 방어 체계를 제시하면서 한국은 방어선 밖에 두었다. 일본 방어에 필요한 종속적인 위치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호, 146쪽).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8 문서는 1948년 4월 베를린 사태 등 유럽의 상황 악화로 주한미군의 철수가 필요하다며 그해 12월 31일로 제시했다. (김철수, 51쪽). 미국은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자 그해 6월부터 공수작전을 시작하는 등 유럽의 냉전도 점차 긴박해졌다. 2차 대전이 끝나고 5년가량이 지나 병력과 군비를 대폭 축소한 미국으로서는 전략적 가치가 높지 않은 한국에 병력을 주둔하며 강한 방어 의지를 가지기도 어려웠다.
주한 미군 철수
주한 미군 철수는 소련이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를 완료한 뒤 압박하고 나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런데다 미국과 한국 국내에서는 철수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1948년 8월 시작된 미군 철수 작전명은 ‘크래버플 플랜(crabapple plan)’. 당초 시한은 그해 12월이었다. 그런데 그해 하반기 남북한에 각각 정부가 들어서 분단이 고착화한 데다 여순 사건, 북한의 잦아진 38선 도발 등으로 연기돼 이듬해 6월 30일 완료됐다. 한국에는 500명 규모의 군사고문단(KMAG)만 남았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이 공산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은 미군 철수를 승인한 맥아더에게 책임이 있다고 미 정부는 책임 일부를 돌렸다. 맥아더는 전쟁이 끝난 후에 반박했다.
“내가 동의한 것은 한국군 10개 사단을 현대식으로 완전히 무장하여 대체한다는 조건하에서 워싱턴 당국의 검토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나의 동의 조건은 이뤄지지 않고 철수만 이뤄졌다. 그 책임은 국무성이 져야 할 것이다”(‘정보’ 6호, 125쪽)
미국 극동군사령부가 1948년 4월 27일 자로 작성한 주한 미군 철수 계획서 ‘크래바플’
“북한군에 남침 기회와 용기를 북돋은 한국군 수준”
미국은 한국군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개전 시 규모 10만3800명)하고 공군 창설에 반대했다. 1950년 1월 26일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은 6만5천명 유지에 필요한 지원뿐이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도 영향을 미쳤다. 미군 철수 이후 북진을 견제한다며 방어무기만 제공했다. 소련제 T-34 탱크와 항공기 등으로 중무장한 북한에 맞서 전차, 155mm 곡사포 등을 요청했으나 산악이 많은 한국의 지형, 도로와 교량 조건상 탱크는 필요 없다고 KMAG는 판단했다.
맥아더는 “한국군은 전선에 배치된 군 병력이 아니라 경찰대원이다. 무기는 경화기뿐이고 공군이나 해군은 아예 없으며 전차, 대포 또는 기타 전투부대에 필수적인 무기는 없었다. 한국의 북한 공격을 방지하는 조치라지만 북한군에 남침할 기회와 용기를 돋워준 것이다.”(맥아더, 165쪽)
‘정보 실패’가 문을 열어 준 북한군 남침
그날의 도발을 막지 못한 것은 적색 조명탄이 올라갈 때까지 잇단 적색 경고등을 무시한 데도 책임이 크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봄 중앙정보국(CIA)은 북괴가 산발적인 습격을 바꿔 언제 전면 공격을 할지 모른다고 했다. 다만 언제인지 단서를 제공해주는 정보는 없었다. 더욱이 한국만이 아닌 세계 도처에서 소련측이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가 반복해서 들어왔다”고 회고했다. (트루먼, 308쪽)
북한군 10개 사단 18만여 명이 공격 개시 3일 전 전방 배치를 마쳤다. 대규모 적병력의 이동이 이뤄져 동향에 대한 첩보와 정보가 쏟아졌다. 이 상황에서 워싱턴이나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경각심이 부족하거나 흘려듣고 과소평가하고 무시했다.
미 국무부 고문 덜레스가 전쟁 발발 1주일 전인 6월 19일 방한해 전방 7사단을 방문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북한의 공격을 받더라도 충분한 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맥아더는 “덜레스가 전술적으로 아무런 경험이 없으며 정확한 정보도 없어 한국군이 38선 북쪽 부대에 비해 얼마나 열세인지 알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맥아더는 북한이 한국 측에 공격 준비 사실을 속이기 위해 38선 부근에는 한국군과 거의 같은 정도의 경무장한 병력을 배치하는 기만술도 폈다고 했다. (맥아더, 165쪽).
맥아더가 이렇게 덜레스를 비판했지만 6·25 전쟁이 터질 때 극동군사령관으로서 아시아 전체를 관할하는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정보 실패’가 더 치명적이다.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부 G-2의 ‘정보 실패’
맥아더는 2차 대전 당시 CIA(1947년 창설)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이나 CIA를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전투지역에 CIA가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맥아더는 OSS를 좌지우지했던 소위 ‘동부 주류파’(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등 미국 동부 명문대 출신 정재계 핵심 인맥)를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OSS나 CIA의 정보를 소홀히 하고 G-2로 불리는 자체 정보팀을 가동했다. (핼버스탬, 84쪽)
G-2에 1950년 5월 하순 북한군이 탱크 여단을 만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중(重) 경(輕) 탱크 180대와 장병 1만명으로 구성되고 대전차포, 야포, 오토바이 등도 포함됐다. G-2 책임자 윌로비는 5월 25일 자 ‘일일정보요약’에서 이런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 실정에서 경제적 군사적 실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모터사이클 1개 연대와 500대의 모터사이클이 있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앞서 5월 초 38선에서 2마일(3.2km) 이내 주민을 모두 이동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됐으나 무시됐다. G-2는 농민들이 지뢰를 피해 자발적으로 피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개전 수개월 내 황해도 사리원에서 38선까지 모든 철도를 폐쇄하고 군사용으로만 사용케 했다. 통신 및 간호를 위한 여성 징집, 10대 소년과 일본군 경험이 있는 자들의 황급한 징발 등 정보도 들어왔다. G-2는 ‘전쟁형 편성’으로 2차대전 전 독일이 한 것과 비슷하다고 평가했으면서도 전쟁이 임박한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굴든, 44~46쪽)
OSS 시절 이미 38선 너머로 보낸 요원들이 ‘정예부대를 38선으로 이동시키고 전방의 교량과 철로 보수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첩보를 보내왔다. 그런데 G-2는 정보원의 신뢰성은 ‘F-6’(A∼F 6단계) 등급, 정보의 신뢰성은 6등급(1∼6등급)으로 최하위 평가를 내리며 깔아뭉갰다.
이승만의 항의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직전까지 “한반도는 냉전이 아니라, 실제 총격전을 벌이는 전쟁상태다”고 남침 임박을 경고했다. 이승만은 “미국은 불리한 상황이 오면 즉시 철수할 수 있도록 한 발은 한반도에, 다른 발은 밖에 내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미군은 전쟁 중 불리할 때마다 철수 준비를 했다.
이승만은 남침 소식을 보고 받고 26일 새벽 3시 자고 있던 도쿄의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습디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도 항의했다.프란체스카, 1950년 6월 26일 자)
* 참고 문헌
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 『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하, 1968.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2권, 일신서적, 1993.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유재흥 지음, 『격동의 세월』, 을유문화사, 1994.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권. 2020.
김인철 지음, 『38선에서 휴전선까지』, 보문당, 1992.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남도현 지금,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더, 2010.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조셉 굴든 지음, 김병조 발췌 번역, 『한국전쟁 비화』, 청문각, 2002.
『정보』 6호, 공보실발행, 1956.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