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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미국 불참전’ 오판한 러시아, 북한 남침을 승인했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1회] ‘미국 불개입’ 오판(誤判)이 부른 6·25 전쟁 (下)

한국과 미국이 ‘정보 실패’로 북한군의 동향과 남침 정보를 소홀히 하고 대비태세도 느슨해져 있을 때 북한과 소련은 강한 남침 의지와 치밀한 준비로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김일성의 남침 의지와 집요한 스탈린 설득

“1950년 새해 국토의 완정과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새로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힘차게 전진합시다. 새로운 승리를 향하여 전진하는 조선인민에게 영광이 있으라!” 김일성의 1950년 신년사에 남침 도발에 대한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이성춘, 75∼87쪽). 마오쩌둥이 중국 대륙에서 공산혁명을 이루는 것을 보고 적화통일에 대한 투지를 불태웠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11일 정치국 고위간부와 소련의 군사고문단 회의에서 “미국의 개입은 없을 것이다. 북한은 개전 후 3주 이내에 승리한다, 미국이 개입을 결정해도 참가에만 50일이 걸린다. 인민군이 내려가면 20만 명의 지하 공산단원이 봉기한다”고 말했다.(김계동, 14∼15쪽).

김일성의 자신감은 1년여 노력 끝에 스탈린으로부터 모스크바에 남침을 상의하기 위해 와도 좋다는 ‘남침 반(半)승인’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그해 1월 17일 이주연 주중대사 송별연이 끝나갈 때 스티코프 주북한 소련대사에게 “이승만이 북침하면 공격하라는데 공격하지 않으니 인민의 해방과 통일 사업이 지연되고 있다. 스탈린과 만나 나의 행동을 허락받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언제든지 김일성을 만나 회담하겠다. 그를 도울 준비를 하겠다”고 회신했다. (선즈화, 321쪽)

1년 전만 해도 스탈린은 김일성의 잇단 호소와 요청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국과의 군사 대결을 우려하는 등 여러 조건을 달았다.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북한 남침을 반대하는 결의문도 채택했다.



스탈린은 ‘남침 승인’ 첫 사인을 보낸 뒤 2월 북한군 3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장비와 탄약을 지원하기 위해 1951년에 계획한 차관 1억3000만 루블을 앞당겨 지원했다. 북한은 금과 은 등 광물로 지불하기로 했다. 2월 말에는 군사고문단장을 바실리예프 중장으로 교체하고 북한군 각급 조직에 군사고문을 파견해 남침 계획 지도를 시작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1950년 3월 30일〜4월 25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가진 면담에서 김일성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4가지 이유를 들며 남침 지원 약속을 받았다. ⓵기습 공격으로 3일 내 승리 ⓶20만 남조선 공산당원 봉기 ⓷남한 유격대(빨치산)의 지원 ⓸ 미국 참전 준비 부족.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고, 중국 지도부가 승인하는 경우 해방전쟁은 시작될 수 있다”고 했다.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뒤 소련 무기와 장비들이 청진항에 쏟아져 들어와 38선에 배치된 부대에 보급됐다.


중국으로부터는 병력 귀환

북한은 중국으로부터는 병력을 보강했다. 북한은 국공내전 중 인민해방군에 편입된 한인 병사들의 귀환을 요구했다. 중국은 내전이 끝난 뒤 병력 감축 필요도 있었던 터여서 흔쾌히 동의하고 속속 돌려보냈다. 전쟁 전까지 돌아온 한인 병사 6만3천여명은 북한 병력의 3분에 1에 달하는 데다 국공내전으로 실전 경험도 풍부해 남침의 주력이 됐다.



스탈린 김일성 지원과 마오쩌둥 견제 ‘음모론’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기로 마음을 바꾼 1950년 1월은 마오쩌둥이 공산혁명 이후 처음으로 모스크바에 장기간 머물고 있을 때였다. 스탈린은 ‘남침을 상의하기 위해’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오라고 한 것에 대해 마오쩌둥에게는 비밀로 했다.

5월 13~16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나 스탈린의 남침 지원 의사를 전달했을 때에야 알고 마오는 자신과 상의 없이 결정된 것에 놀랐다. 그는 스탈린에게 직접 확인한 뒤 “중국이 먼저 타이완 함락한 뒤 통일에 도움 주겠다”고 했다. 마오는 6·25 남침을 외신 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 마오쩌둥에게는 알리지 않고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이런 상황을 두고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하다 태도를 바꾼 것은 김일성의 요청이나 설득이 아닌 중국 또는 마오쩌둥에 대한 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소련의 주요 적국인 미국과 중국이 외교관계가 정상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해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하기 위한 대안이 한반도 전쟁이었다는 것이다.(손튼, 56쪽). 따라서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하는 것은 한반도 통일 지원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이 적대관계가 되는 것이 스탈린의 목표라는 것이다.

반론도 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에 동의한 것은 미국이 무력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으로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중미 관계가 철저하게 파괴된 것은 스탈린이 조선 전쟁을 결정한 목적이 아니고 조선전쟁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선즈화, 67쪽)


전쟁 결정 핵심 변수는 ‘미국의 군사적 불개입’ 오판

‘병자국가대사, 불가불찰(兵者國家大事, 不可不察)’. 손자병법 첫 구절은 ‘전쟁은 국가의 대사이기 때문에 신중히 살펴야 한다’고 했다. 한국과 미국의 허술한 대비와 북한과 소련의 치밀한 준비가 균형점을 잃어 오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사’를 결행하면서 공산 측이 더 중요하게 살핀 것은 무엇일까. 바로 ‘미군의 불참전’에 대한 믿음 또는 과소평가였다.

마오쩌둥은 1950년 5월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에게 “미국은 이처럼 조그만 국가를 위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군이 참전하면 돕겠다고 하면서도 ‘불참’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해 4월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을 만나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는 경우 소련은 미국과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 미군이 개입하면 마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김일성이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남침 유세(遊說)에서 “성공할 테니 도와달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미군이 개입 하지 않을 것이다. 개입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낼 것”이라고 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말이나 애치슨이 연설에서 ‘한반도를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한 것만을 보고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미 국가안보회의(NSC)의 1급비밀이라며 거이 버지스 등 영국인 이중 스파이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가 더 작용했다고 한다.(남시욱, 314) 그 정보가 정확하든 아니든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국의 불개입’에 대한 믿음이 북중소 3국 간에 공유되지 않았다면 북한의 남침은 어렵거나 더 여건이 갖춰질 때까지 미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한 것도 초기에는 ‘북진 통일’에 대한 열망과 아쉬움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안보 확약, 즉 동맹조약이 없으면 또 침략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지금은 2만3천여명의 주한미군이 상주하고 있다. 하지만 상대는 더 이상 야크기와 T-34를 몰고 오던 북한이 아니다. 미 대륙까지 도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다양한 중단거리 투발 수단까지 확보했다. 지금의 ‘핵 확장억제’는 그래서 6·25 당시의 ‘미국의 참전 확약’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정전 70년에 ‘왜 전쟁을 알고 막지 못했을까’라는 물음에 주는 시사점이다.



▽ 한강교 폭파의 파장과 논란

1950년 28일 밤 1시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자 2시 반쯤 한강인도교와 철교 3곳이 폭파됐다. 한강 이북의 국군 주력부대가 철수하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다리가 끊긴 것이다. 군부대는 무기와 장비, 트럭 등을 대부분 두고 내려와 전력이 크게 약화됐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시민들 중에는 북한군에 학살되거나 납북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기 폭파’에 대한 책임이 제기되자 이승만 정부는 한강교 폭파 2개월 후인 8월 28일 폭파 현장 책임자 최모 공병감(대령)을 전격 구속했다. 이어 최 공병감은 단심제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을 선고받고 9월 16일 전격 집행됐다. 죄목은 적전비행(敵前非行). 최 헌병감에게 폭파를 명령한 것으로 최 공병감이 진술한 채병덕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그해 7월 전사해 법정에서 증언을 하지 못했다. 최 헌병감의 유족은 1961년 재심을 청구해 1964년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법원은 “절대적 구속력이 있는 상관의 작전명령에 복종한 것일 뿐”이라고 무죄 판결 이유를 밝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한국전쟁사’에는 채 참모총장이 6월 28일 새벽 1시 45분 “적의 전차가 시내로 침입했다”는 요지의 보고를 받고 즉시 최 공병감에게 전화를 걸어 폭파를 명령했다고 기술했다. “한강교를 폭파하라. 나는 이제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간다. 곧 실시하라.”

채 총장이 전화를 걸었다는 시간에 그를 수행해 한강다리를 차로 건너고 있었다는 당시 육군본부 강영훈 인사국장(전 국무총리)은 다른 증언을 했다. 2008년 5월 펴낸 회고록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에서 그와 같은 전화 통화가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강 전 총리는 “최 공병감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변론 기술상 강조한 것으로 추측되나, 세상된 기록된 문서의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게 했다”고 했다.(강영훈, 154쪽). 강 전 총리는 그와는 별도로 “정부가 100만 명 서울 시민에게 말 한마디 못 하고 떠난 상황에서 공병감에게만 책임을 추궁하고 총살형은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고 적었다.

한강교 폭파로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역사학자 굴든은 “군대와 피란민들이 다리를 건너는 도중 폭파돼 많은 사람이 죽었다. 미 군사고문단(KMAG)은 군인과 민간인 500∼800명이 폭사 또는 익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고 적었다.(굴든, 116). 하지만 폭파 작업에 직접 참가했던 한 장교는 “다리가 폭파된 후 다리 밑에 시체가 둥둥 떠 있거나 하는 광경은 없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월간조선 뉴스룸 2013년 7월).

전쟁에서 파괴되는 시설 중에 대표적인 것이 다리다. 6·25 전쟁 중 파괴된 다리 중에는 압록강대교, 대동강철교, 한강인도교와 철교, 왜관 철교 등 적지 않다. 한강교는 ‘조기 폭파’로 후퇴 작전에 차질을 빚고 서울 시민의 피해를 키웠다는 평가가 많았다. 다만 소련제 T-34 탱크 200여대를 앞세워 밀고 내려온 북한군의 진격 속도를 잠시라도 늦추는데 한강 다리 폭파가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3일간 머무는데 ‘한강교 조기 폭파’도 한 요인으로 거론된다.



참고 문헌
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이성춘, ‘북한 신년사 분석을 통한 김정은 시대 지속과 변화’, 『융합보안논문지』, 제14권 61 호, 75∼87쪽. 2014.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