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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방어선에선 한반도 뺐던 미국, 어느 때보다 빠르게 참전했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2화]‘애치슨 라인’이 6·25 전쟁 불렀나

“미국의 태평양 지역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오키나와로 연장되는 선에서 필리핀으로 연결된다. 이들 지역을 제외한 태평양의 여타 지역은 외세의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보장해줄 수 없을 것이다. 공격이 있으면 초기 대응은 공격받은 국민들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이 1950년 1월 12일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 강연에서 했던 이 한 구절이 한반도에 ‘북한의 남침’을 불러온 초대장처럼 인식됐다. 6·25 전쟁은 애치슨 강연이 나온 뒤 5개월여 지난 뒤 터졌다. ‘애치슨 라인’이 빌미를 제공한 것은 맞지만 과도하게 낙인을 찍어 애치슨은 억울한 측면이 없지 않다.

6·25 전쟁 당시 미국 딘 애치슨 국무장관(1893∼1971)

‘방어선 제외가 방어 제외는 아니었다’

애치슨의 극동방어선은 2차 대전 패전국 일본을 무장해제하고 군정을 실시하고 있던 일본 방어를 강조하면서 나왔다. 애치슨 라인이 논란을 일으킨 건 ‘라인’ 언급 이후 ‘태평양 다른 지역의 안보는 아무도 군사 공격으로부터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구절이다.

하지만 연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공격받은 국가가 저항한) 다음에는 유엔헌장에 따라 문명화된 세계 전체의 약속에 의존해야 한다’고 했다. 유엔이 개입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애치슨은 “유엔은 지금까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독립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조직으로 ‘약한 갈대’가 아니다”고 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유엔의 신속한 움직임은 애치슨의 말처럼 유엔이 ‘약한 갈대’가 아님을 증명했다.


“한국에서 미국의 책임은 더 직접적”

애치슨의 연설 주제는 ‘아시아의 위기 : 미국 정책의 한 시험대’였다. 국무장관으로서 미국이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밝히는 것으로 많은 공을 들여 작성한 연설이었다.

애치슨은 아시아를 태평양의 남과 북으로 나누고 북쪽에 미국의 책임과 기회가 더 크다고 강조했다. 극동군사령부가 군정을 실시하고 있던 일본은 ‘미국이 직접 책임을 지며 직접적인 행동의 기회를 지닌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도는 낮지만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한국은 미국이 군사점령을 끝내고 세계가 인정하는 주권 국가를 세웠기 때문에 ‘책임은 더 직접적이고 기회는 더 분명하다’고 했다.

애치슨 연설에서 ‘책임’을 강조한 뒷부분만 알려졌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감사 전문’을 보냈다. 한국이 ‘애치슨 라인’에 포함된 필리핀보다 더 중요시됐다는 한국 언론 보도도 있었다.(도진순, 195쪽) 그만큼 애치슨 연설에서 한국은 방어선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어도 방어 의지는 작지 않았다.

애치슨은 연설에서 대만 국민당과 장제스(蔣介石)에 대해 ‘중공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으나 국민의 지지 철회로 군대가 녹아내렸고, 섬의 난민이 되었다’고 한 것과 대조된다. 1월 5일 트루먼 대통령과 1주일 뒤 애치슨 연설은 대만이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팽(烹)’된 것을 확인한 것이다. 대만에 대한 ‘침공의 초대장’으로 해석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침공의 초대장을 6·25 전쟁을 통해 한국이 받은 꼴이 됐다.

스탈린과 김일성이 본 ‘애치슨 라인’

소련은 애치슨 라인을 어떻게 보았을까. 스탈린은 ‘조선반도 같은 작은 전쟁에 개입할 리는 없을 것’이라는 북한의 말을 확인하는 것으로 해석했을 수 있다.(선즈화, 334쪽). 소련은 북한의 남침을 국가 간 침략이라기보다 중공에서 막 끝난 국공내전처럼 ‘끝나지 않은 내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미국은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이 승리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한국전쟁에서도 판세가 결정되면 이를 뒤집으면서까지 희생을 치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애치슨 연설을 이해했을 수 있다.(핼버스탬, 84쪽)

김일성은 좀 달랐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찾아가 남침에서 속전속결 승리를 장담하며 지원을 요청할 때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이유로 남한이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방어선에서 제외돼 김일성의 남침을 불러왔다고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유엔군 참전 기념비

애치슨 연설은 마오쩌둥 겨냥

트루먼(1월 5일)과 애치슨(1월 12일)이 잇따라 연설을 한 때는 마오가 신중공을 선포한 뒤 처음 모스크바에 찾아와 스탈린과 회담을 하던 때였다. 미국이 국공 내전에서 지지하던 국민당과 장제스를 버리고 마오의 공산 정권과 관계를 정상화해 중소 간에 틈을 벌리기 위한 ‘쐐기 전략’을 펴던 때였다. 애치슨의 연설은 사실은 모스크바의 마오를 겨냥한 것이었다. 소련이 제정 시절에 연해주 땅을 뺏어간 것처럼 사회주의 국가가 된 후에도 여전히 영토를 탐내고 있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폭로하면서 양국을 갈라놓으려고 한 것이다. 몰로토프 외상은 연설이 나온 며칠 후 마오에게 “애치슨 연설의 목적은 소련과 중공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것이다. 대만을 점령하기 위한 중상모략의 연막전술을 퍼뜨리는 것”이라고 했다.

소련이 발끈해 마오에게 같이 외무장관 명의의 반박 성명을 내자고 요구했다. 마오는 난처했다. 소련은 ‘애치슨 연설’이 중상모략이라고 하지만 당시 중소 관계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마오쩌둥과 스탈린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마오는 결국 수위를 낮춰 신화사 통신 사장 명의로 격을 낮춰서 애치슨 연설을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키신저, 158쪽)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 1975년 세워진 미국군 참전 기념비. 육해공군과 해병대가 단합해 침략을 물리쳤다는 것을 형상화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경기 파주시 임진각의 미국군 참전 기념비 주위로는 미국 각 지방정부와 지역 출신의 장병이 참전했음을 나타내는 동판이 있다. 사진은 캘리포니아주.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중소동맹 체결이 가져온 미국의 아시아 정책 변화

애치슨이 중소 간 간격 벌리기, 이른바 쐐기 작전을 폈지만 연설 한 달여 만인 1950년 2월 14일 중소가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애치슨은 “중소 조약은 제국주의 출현을 알리는 위험한 징조 중 하나”라며 중공 지도부가 중공을 소련에 팔아먹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렇게 되자 대만을 버리면서 중소를 갈라치게 하려던 미국의 대만 정책도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했다.(선즈화, 269쪽)

중소동맹은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미 정부는 1949년 12월 채택한 NSC-48/2는 ‘선택적 봉쇄’로 소련을 봉쇄하면서 중소 간에 사이를 벌리기 위해서 중공에게 대만이라는 먹잇감까지 던진 것이었다. 이제 소련 봉쇄를 위해 중공 봉쇄도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전환했다.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던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새롭게 평가됐다.

1950년 5월 20일 맥아더는 참모장 회의에서 “중공의 대만 점령은 소련의 점령과 같다. 이 경우 미국의 태평양 주변 방어선은 무너진다. 대만은 대소 전략의 이상적 위치에 있는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라고 말했다.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서 대만의 중요성은 처음에는 중공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소련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맥아더 장군

중소 동맹 체결은 ‘애치슨 연설’의 역효과

흥미로운 점은 애치슨이 중소 거리 벌리기를 위해 했던 강연이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은 마오가 조약 개정으로 요구했던 사항을 모두 수용하면서 동맹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렇게 마음을 바꾼 데는 애치슨 연설도 한 요인이었다.

미국은 대만을 버리면서까지 중공과 관계 정상화 사인을 보내자 스탈린은 12월 16일 첫 회담에서는 완고했던 중소조약 재협상 불가 입장을 바꿨다. 기존 조약을 폐기하고 새 동맹조약을 맺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는 미국이 당초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마오는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내세우며 스탈린을 압박했는데 미국이 마오의 전략에 맞장구를 쳐준 격이 됐다.

스탈린이 ‘미중 관계 정상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중공과 조약을 맺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다. 김일성의 ‘남침’ 승인 지원 요청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스탈린은 미중을 적대관계로 몰아넣는 쐐기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것도 중공이 대만을 정복하기 전에 해야 했다.

‘애치슨 라인’은 1년 전 ‘맥아더 방어선’

1948년 3월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은 미드웨이 제도, 알류샨 열도,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 오키나와 등을 포함하는 U자형 방어 체계를 제시했다. 도서방위선 설정은 일본과 필리핀 등 미국 안보에 직결되는 지역에 대한 안전 보장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전략적 측면에서 한국은 일본의 종속적인 위치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나타난다. 애치슨의 극동방어선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의 구상을 정치적으로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이상호, 146쪽).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맥아더 자신도 후일 회고록에서 “애치슨의 극동 문제에 대한 오판은 잘못된 정보에 기인한 것”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자신이 구상했던 방위선과 유사한 것을 애치슨이 다른 아시아 정책을 설명하면서 강조한 것인데 전쟁을 유발한 한 요인으로 지목하고 나선 것이다. 맥아더로서는 자기모순적인 것이다. 애치슨과 맥아더가 불편했던 관계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애치슨은 1950년 10월 트루먼과 맥아더 간의 웨이크섬 회담 이후 맥아더가 경례를 하지 않는 등 결례를 범했다며 해임을 건의했고 1951년 4월 해임 때도 가장 적극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의 ‘방어선 붙들기’ 노력

“불행한 과거사 싸움 대신 일본이 우리와 같이 위기를 깨닫고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의 생명과 자유를 위해 기꺼이 협조할 수 있다면, 양국 사이의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도진순, 199쪽)

북한 핵 능력이 높아지면서 한일 안보협력이 높아지는 2023년 한일 관계에 그대로 적용될 것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1950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이 도쿄에 맥아더를 만나러 갔을 때 한 말이다. 이승만은 6·25 전쟁 후 한반도가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된 것이 북한 남침의 빌미를 줬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6·25 전쟁 전 극동방어선의 주요 거점에 있는 일본과 한국을 연결시키고자 분투했다.



▽  1950년 ‘애치슨 라인’부터 6·25 전쟁까지

·1월 5일 트루먼 연설 “대만 포기”
 12일 애치슨 강연 ‘애치슨 라인’ 선포
 17일 김일성, 이주연 환송연에서 러시아측에 ‘남침 상의 스탈린 만나고 싶다’  
 30일 스탈린,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허용. 남침 승인 첫 신호

·2월 14일 중소동맹 조약 체결

·3월 30일~4월 25일 김일성 박헌영, 모스크바 방문

·5월 13~16일, 김일성 박헌영 베이징 마오 회담.
 29일,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 중장, 전쟁 및 북한군 운용계획 완성

·6월 16일 스탈린의 전쟁계획 승인. “6월 25일 옹진반도를 시작으로…”
 25일 북한 남침

▽ 애치슨 연설문 요지

국민지지철회로 ‘난민’된 장제스


대만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정부가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군사력에 직면해 무너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장제스는 중국 역사상 어떤 통치자보다 더 큰 군사력을 가졌었다.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도 받았다. 그런데 4년 후 무슨 일이 생겼나. 그의 군대가 녹아 없어졌다. 그에 대한 지지도 녹아내렸다. 그는 남은 군대와 함께 해안에서 떨어진 작은 섬에서 난민이 되었다.

이는 중국인의 거의 지칠 줄 모르는 인내심이 끝났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부를 전복시키려 애쓰지 않았다. 전복할 것도 없었다. 단순히 무시했을 뿐이다. 그들은 정부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철회했고 그러자 군 조직 전체가 붕괴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흐름을 타고 승리와 권세를 차지하기 위해 기민하고 교활했다.

소련 공산체제의 제국주의, 중국 영토 침탈

소련 공산주의는 러시아 제국주의의 추진력에 새로운 방법과 기술, 개념을 추가해 중국 북부지방을 분리 합병했다. 외몽고에서는 이미 완료됐고 만주에서도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내몽고와 신장에서는 소련 요원들로부터 기쁜 보고가 들어오고 있다. 우리는 중국 국민들이 가질 정당한 분노와 증오를 러시아인에게서 우리에게로 돌리려고 해서는 안된다. 중국 국토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자는 누구든 중국의 적이며 우리의 이익에도 반한다.

극동 방어선, 일본에서 필리핀까지

일본의 패배와 군축은 일본의 안보를 위해 필요한 군사적 방어를 떠맡을 임무를 미국에게 부여했다. 방어선은 알류산열도를 따라 일본과 류큐제도 그리고 필리핀 제도까지 이어진다.

태평양 다른 지역 안보는 아무도 군사 공격으로부터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공격이 발생하면 처음에는 공격을 받은 국가가 저항해야 한다. 그 다음에 유엔 헌장에 따라 문명화된 세계 전체의 약속에 의존해야 한다. 유엔은 지금까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독립을 지키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것으로 약한 갈대라고 입증되지 않았다.

미, 한국에 직접적인 책임

우리는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고 직접 행동할 기회도 있다. 정도는 덜하지만 한국에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우리는 직접적인 책임을 졌고 행동을 취했다. 한국에서 우리는 군사적 점령을 끝내고 유엔과 협력하여 거의 모든 세계가 인정하는 독립된 주권 국가를 세우는 위대한 조치를 취했다. 그곳에서 우리의 책임은 더 직접적이고 기회는 더 분명하다.


참고문헌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1, 2권, 일신서적, 1993.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헨리 키신저 지음, 권기대 옮김, 『헨리 키신저의 중공 이야기』, 민음사, 2012.
도진순, ‘1950년 1월 애치슨의 프레스클럽 연설과 하나의 전쟁 논리’, 『한국사연구』, vol. 119, 185∼231쪽, 2002.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