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스탈린은 한반도 전쟁에서 무엇을 노렸을까[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3회] 소련, 왜 유엔군 파병 막지 않았나
6·25 전쟁 발발 사흘째 북한군이 서울까지 밀려 들어오고 있던 1950년 6월 27일 정오(현지시간) 뉴욕 롱아일랜드 ‘스톡홀름 호텔’의 한 식당. 트뤼그베 리 유엔사무총장은 유엔 주재 미국 대표 그로스와 소련 대표 말리크의 중간에 앉아 점심을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트뤼그베 리 총장은 말리크에게 오후 안보리에서 한국전쟁 관련 회의를 한다고 알리면서 “귀국의 이익을 위해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스 대표는 탁자 밑에서 발로 트뤼그베 리를 툭툭쳤다. 말리크에게 굳이 회의 참석을 권유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유엔회원국들에게 한국전 참전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예정인데 소련 대표가 참석하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리크는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 전 가지 않겠습니다”고 거절했다.(선즈화, 360쪽)
말리크는 이틀 전 ‘북한의 남침은 평화 파괴’라며 ‘38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구한 안보리 결의안 표결에도 불참했다. 7월 7일 유엔 설립 이후 처음으로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하는 안보리 결의안을 낼 때도 방관했다.
트뤼그베 리 유엔사무총장
말리크 주유엔 소련 대사
소련은 북한의 남침에 대응한 유엔의 초기 3차례 결의안에 모두 불참했다. 그해 1월 안보리를 탈퇴하면서 내세운 명분처럼 자유중국(대만)이 유엔 회원국으로 남아있는 것에 대한 항의이자 유엔의 합법성에 흠집을 내고자 한 것이다. 미국은 소련이 유엔안보리 회의에 참석해 몽니를 부리기보다 오히려 길을 터주자 유엔을 한국전쟁에 대한 집단안전보장이 작동되는 무대로 활용했다. 스탈린은 왜 유엔이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사실상 수수방관하고 있었을까.
스탈린이 체코 대통령에 보낸 한 통의 편지
스탈린이 6·25 전쟁 초기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을 저지하지 않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해 흥미로운 문건이 뒤에 공개됐다. 러시아 학자 라도프스키는 크렘린궁 문서보관서에서 찾아냈다며 스탈린이 1950년 8월 27일 체코의 클레멘트 가트왈드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2005년 공개했다. 소련이 왜 안보리에 불참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네 가지 목적이다. 첫째, 소련과 신중국의 일치단결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둘째, 미국이 대만 국민당 정부를 중국 대표로 인정하는 정책이 터무니없고 어리석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안보리에 소련 중국 두 강대국이 참석하지 않아 안보리 결정은 불법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넷째, 미국의 손발을 자유롭게 해줘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해 어리석은 짓을 하도록 했다. 미국의 참모습을 세계 여론에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목적을 이미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전쟁 발발 24시간 가량 만에 나온 유엔 안보리의 1차 결의안. 북한의 침략행위 중지와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했다.
‘안보리 불참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
라도프스키는 소련의 안보리 불참은 ‘방치’가 아니라 의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무장 개입을 예견했지만 저지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이 전쟁에 빠져 힘이 약화되면 유럽에서 지위도 훼손시킬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온 학자 판초프에 따르면 스탈린 사후 집권한 흐루쇼프도 스탈린이 미국을 중국과의 충돌에 끌여들였다고 인정했다. 흐루쇼프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우리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한에 미국을 끌어들인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라고 말했다.(판초프, 536쪽)
소련의 안보리 불참이 스탈린의 신중한 고려와 세밀한 계산을 거친 책략이었으며 목적은 미국을 전쟁의 늪에 빠뜨리고 중국도 출병시켜 미국과 충돌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스탈린 음모설’이다. 음모설에 따르면 6·25 전쟁 발발 후 소련의 안보리 불참은 약 5개월을 거슬러 그해 1월 소련이 안보리를 탈퇴할 때와도 관련이 있다.
마오쩌둥(왼쪽)이 1949년 12월 21일 스탈린의 70회 생일을 계기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함께 발레공연을 관람하던 모습.
소련의 1월 안보리 탈퇴, 왜 그때
1월 6일 소련의 비신스키 외상은 모스크바에 와 있던 마오쩌둥에게 ‘유엔 안보리에 대만 대표가 계속 남아있는 것은 비합법으로 대만을 탈퇴시켜야 한다’는 성명을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소련과 중공의 ‘대만 탈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련은 13일 기다렸다는 듯이 안보리 탈퇴를 선언했다.
당시 미국 주도의 유엔에서 소련과 중공의 요구는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소련이 이런 행동에 나선 것은 다른 계산이 있었다는 것이 ‘스탈린 음모론’의 분석이다. 명분은 ‘대만을 몰아내고 중공을 유엔에 가입시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내는 명분 만큼 중공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과 마오의 ‘조약 개정’ 기싸움
스탈린은 일본이 항복하기 하루 전날인 1945년 8월 14일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와 중소 조약을 체결했다. 창춘(長春) 철도, 다롄(大連), 뤼순(旅順)항 등에 관한 소련의 이권을 인정하는 것이 골자다. 소련은 이 조약으로 러일 전쟁 패배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잃었던 이권 대부분을 회복했다.
마오쩌둥이 1949년 12월 16일 처음 스탈린과의 6시간 가량 회담에서 주요 관심은 조약 개정이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조약은 얄타협정에 근거한 체결한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마오는 참여하지 않은 얄타체제, 미국 영국과의 공조체제를 들어 마오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스탈린과 마오의 조약 협상 신경전 바탕에는 국익에 대한 첨예한 갈등도 있지만 스탈린의 마오에 대한 견제 심리, 즉 마오가 ‘아시아의 티토’라는 의구심도 바탕에 깔려있었다. 스탈린이 보는 마오는 자기가 이룬 업적과 중국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하고 지나치게 독립적이었다. 혁명의 승리는 곧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유고의 요시프 티토 대통령.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나치 독일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이뤘으나 소련의 개입을 거부해 위성국이 되지 않고 비동맹외교 노선을 걸었다.
내전에서 마오가 이끄는 공산당이 승리한 것은 스탈린에게는 반갑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없이 혁명을 달성했으니 소련의 위상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45년 국민당 정부와 맺은 ‘침략적인 성격’의 많은 이권이 담긴 중소조약이 유지되기 어려울 가능성도 많았다.(손튼, 28쪽). 스탈린은 마오와의 공산주의의 이념적 동지라는 등의 명분 때문에 일본과 전쟁을 벌여 얻어 낸 이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해 전 변절한 티토를 생각해서라도 중국이 국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생각은 거의 없었다.(키신저, 152쪽). 마오가 내전을 일단락짓고 신중국을 선포한 뒤 모스크바로 가서 가진 스탈린과의 첫 회동도 몇 차례 무산된 끝에 이뤄졌다.
서풍(西風)이 도와준 마오의 조약 협상
중소가 조약 협상에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뜻하지 않게 서방 국가들이 마오쩌둥에게 돌파구를 마련해줬다. 먼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이다.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장기간 만나고 있는 것을 본 미국은 중소가 밀착하는 시그널로 보고 이를 막기 위해 부심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이 1월 5일과 12일 연설에서 잇따라 대만을 포기하면서까지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스탈린에 경각심을 주었다. 스탈린은 미중 관계 정상화는 미소 대결에서 최악으로 보았다. 처음 마오를 만났을 때 냉랭했던 태로를 바꿔 조약 개정이 아닌 조약을 아예 새로 체결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기세가 오른 마오를 견제하기 위해 김일성이 들고 온 전쟁을 통해 중국과 서구의 대립을 유도하려고 했다.
마오도 스탈린과의 협상에서 서방국과의 관계 정상화 카드를 활용했다. 마오는 영국이 곧 신중국을 승인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마오쩌둥이 처음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중소조약 개정을 얄타체제를 들어가며 거부했던 스탈린은 태도를 바꿨다. 소련은 1945년 조약이 ‘시대착오적’이라며 개정 아닌 폐기를 들고 나왔다. 불과 한 달도 안되는 기간 동안 상황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의 ‘지평리 전투 기념관’에 게시되 있는 유엔군 참전 규모. 16개국에서 전투병을 파병했다. 구자룡 기자 .
‘안보리 탈퇴도 불참도 중국 고립이 목표’ 스탈린의 더 큰 음모
‘음모론’은 소련이 안보리를 탈퇴한 것도 유대를 강조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유엔 가입을 막았다고 보았다. 당시 유엔에 중국을 가입시키자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안보리 11개국 중 7개국이 찬성하면 되는데 인도 노르웨이 소련 유고 및 영국이 중국 정부를 인정했다. 프랑스와 이집트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소련대표 말리크가 항의 퇴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를 유엔에 대한 협박으로 받아들여져 마오의 중공을 유엔에 가입시키려는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소련은 8월 1일에야 안보리에 복귀했다. 그 전까지 미국이 북한의 남침에 자유롭게 유엔을 동원하도록 했고, 중국에는 유엔 가입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다. 더욱이 중공이 소련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을 지속시켰다.(손튼, 103쪽). 이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을 유도해 중국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려는 스탈린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손튼 교수 등은 분석했다.
선즈화 교수는 소련으로서는 말리크가 6·25 전쟁 안보리 결의안에 참가하면 진퇴양난이 됐을 것이라고 봤다.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북한과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배반을 의미한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북한의 배후에 모스크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두 달 가량이 지난 8월 1일 소련은 복구했다. 유엔 회원국들의 안보리 결의안 집행에 소련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한국전쟁에 대한 핵심적인 결의안이 모두 통과된 후여서 설득력은 떨어져 보인다.
▽ 대소련 봉쇄 마스터 플랜, NSC-68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NSC)의 정책 보고서인 NSC-68은 1949년 8월 소련의 원자탄 실험 성공과 10월 중국 공산화 그리고 1950년 2월 중소 동맹체결이라는 거대한 지각 변동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의 대공산권 대응 전략이다. 특히 갓 출범한 중국보다는 소련이 대담해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재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1948년 11월 유럽에서의 소련 봉쇄정책을 담은 NSC-20을 채택했으나 이를 아시아로 확대한 것이다. 그후 20여년간 대 공산권 정책의 기조가 됐다. 트루먼은 1950년 4월 이 정책을 보고받았으나 9월 정식 승인했다. 6·25 전쟁이 이 정책에 힘을 실었다. 1975년 2월 기밀문서에서 해제될 만큼 비밀에 부쳐졌다.
트루먼 대통령과 에치슨 국무장관은 중소가 가까워지는 것을 막는 이른바 ‘쐐기 전략’을 추진했다. 1949년 1월 나온 NSC-34는 미국의 주요 정책 목표로 ‘중국이 소련의 속국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1949년 12월 NSC-48/2나 애치슨의 1950년 1월 ‘극동 방어선에서 대만 제외’ 등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런 기조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 변화가 잇따라 나오면서 중소 양국을 같이 견제하는 정책을 마련할 필요가 생겨서 나온 것이 NSC-68이었다.
NSC-68은 형세 진단에서 지구상 도처에서 세력균형이 소련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봤다. 가장 취약한 곳은 아시아. 국가안보를 궁극적으로 보장해주는 수단은 군사력이란 논리에 따라 미국의 재무장을 정당화했다. 4,5년 동안 매년 400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과 비교해 소련이 국가예산 중 높은 비율을 군의 하드웨어에 투자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여기에는 과장도 있었다. 소련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소련의 경제력을 지나치게 부풀리기도 했다.
소련이 1950년 중반 10개에서 20개, 1954년 중반 200개의 핵무기를 보유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산화된 중국은 이곳을 발판으로 공산세력이 아시아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갈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이런 진단 하에 미국의 방어선에서 대만은 장제스의 집권 여부와 관계없이 우호적인 국가로 유지해야 했다. 한반도는 중국 소련 미국 같은 강대국 이익이 교차하는 지구상 유일의 지역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위치다. 미국이 추구할 궁극적인 목표로 소련을 군사적으로 패퇴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에 두었다.(손튼, 171쪽)
<참고문헌>
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등 옮김. 『최후의 천조(天朝)』, 도서출판 선인, 2017.
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 『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
헨리 키신저 지음, 권기대 옮김,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 민음사, 2012.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