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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북한군 왜 서울에서 3일 허송했나(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5회] 북한군 ‘서울 3일’ 미스터리(1)

“북괴군의 ‘서울 3일’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남한 각지에서 공산당 지하조직이 일제히 폭동을 일으키는 ‘붉은 반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주장이 있다. 북괴군이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밀어붙였다면 미 지상군 참전도,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이다.” (정일권, 29쪽)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한 뒤 3일 만인 28일 서울 한강 이북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7월 1일 한강을 넘을 때까지 3일간 서울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고 머물렀다. ‘북한군 서울 3일’ 체류가 왜 발생했는지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남침 승인과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전격전’을 주장한 것과는 다른 행보였고 전쟁의 양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서울 영등포에 맥아더 장군이 한강 방어선을 시찰했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서울 3일’이 미 지상군 파병 앞당겼다
 
북한군이 한강 이북에 머무르는 3일간 국군은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한강 이남에 수도사단, 2사단, 7사단 등 3개 사단을 배치해 시간을 벌었다. ‘북한군 서울 3일’ 기간 중인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도쿄에서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수원 비행장에 내린 뒤 이승만과 만난 뒤 곧바로 한강 방어선까지 왔다.

북한군이 한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120mm 박격포탄을 퍼붓는 가운데 맥아더는 영등포의 한 방어선 개인호에서 일등중사에게 묻는다.

“자네는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셈인가?”

“철수 명령이 없었다. 명령이 내려지든가, 죽는 순간까지 참호를 지킨다.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다. 무기와 탄약을 달라”

맥아더는 도쿄로 돌아가 트루먼에게 미 지상군 2개 사단 파병을 요청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7월 1일 일본 주둔 미 24사단을 긴급 투입했다. ‘북한 서울 3일’이 미 지상군의 신속한 파병에 도움이 됐다며 전사(戰史)에 전해지는 에피소드다.

1951년 5월 15일 자 미군 정보지에는 “(북한이 신속히 남하하지 않아)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한 데는 서울 점령 뒤 한강 도하를 지체한 것 때문”이라는 김일성의 탄식이 있다.

38선에서 서울까지는 약 45km. 국군의 산발적인 저 항속에 북한군은 하루 15km씩 진군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에 머문 3일이면 7월 1일 수원, 7월 4일에는 조치원까지도 진격할 수 있었다. ‘북한군 서울 3일’은 남쪽으로의 진격이 며칠 늦어진 이상의 6·25 전쟁 전체의 양상을 바꾸는데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왜 3일을 한강 이북에서 머물렀는지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북한군이 미아리고개를 넘자 1950년 6월 28일 새벽 폭약을 터뜨려 파괴한 한강 인도교

‘한강 다리 끊어져서 넘지 못했나’

북한군은 6월 27일 4시 창동 방어선, 28일 1시에는 미아리 방어선을 넘었다. 국군은 미리 설치해 둔 폭약을 터뜨려 28일 새벽 2시 반 한강 인도교와 경인 철교를 끊고 광진교는 4시에 폭파했다. 한강철교는 일부만 파손됐다. 북한군이 서울 중심을 점령하기 전 한강 다리가 끊어져 신속히 도하를 못 했다는 시각이 있다.

당시 한강은 수심 3m, 강폭 700〜1500m가량이었다. 북한군은 한강을 도하할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한강에는 마포나루 등 6개 나루터에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다. 1개 소대 병력도 탈 수 있는 ‘늘배’라는 목재 운반선도 있었다. 길이가 12m가량이다.

한강에는 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진교 한강 인도교 경인 철교는 파괴됐으나 한강철교는 일부 철로 레일과 침목만 손상됐다. 레일과 침목 교체는 수 시간이면 가능했다. 낮 공습을 피해 북한군은 야간 보수 작업을 거쳐 이틀 만에 철로를 보수해 3일 새벽 전차도 건너게 했다. 한강 이남에서 국군이 방어선을 펴고 있었지만 3일간 넘지 못할 만큼 강력한 저항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강 이북의 주력 부대가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하고 다리가 부서져 중장비, 차량, 곡사포와 박격포, 기관총 등을 대부분 버리고 한강을 넘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서울에 들어온 뒤 한강 다리 장악에 소홀한 것도 초기 작전의 실책으로 지적된다. 27일 서울로 진입한 105 전차여단은 한강 다리보다는 중앙청, 서대문형무소, 방송국, 신문사 등을 최우선으로 접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백선엽 장군은 김일성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기세대로 한강을 넘어 남진을 계속했다면 아주 불리했을 것인데 천행으로 김일성이 주춤거리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백선엽 1권, 294쪽)

‘서울만 점령하면 전쟁 끝으로 오판?’

‘북한군 서울 3일’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학계에서는 북한군의 ‘서울 제한점령론’도 제기됐다. 북한 인민군의 남침 목표가 서울을 점령하는 것에 제한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울을 점령한 뒤 뭔가를 기다리며 지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4년 러시아 옐친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한 1949년 1월 〜 1953년 7월 소련 외교문서 중 김일성과 스탈린 간에 오간 서한에는 서울 제한점령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박헌영은 마오쩌둥(毛澤東)과 스탈린을 만났을 때 “북한이 남침했을 때 20만 명이 봉기하고 남한 내 빨치산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6·25 발발 당시 한국군이 보유한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일부는 빨치산 토벌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1948년 10월 여순 사건 이후 빨치산 숫자는 2500여명까지 크게 줄었다가 그 후 다시 늘어나기도 했으나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1950년 초에는 지리산의 빨치산이 대부분 토벌됐다. (KBS 역사스페셜 1999년 6월 22일). 북한군이 서울에서 머무르며 빨치산의 호응을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7월 1일 스탈린은 북한 주재 대사 스티코프에게 보낸 전문에서 “조선사령부가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전혀 통보하지 않고 있다. 스탈린은 남한을 빨리 ‘해방’시킬수록 미국이 참전 가능성이 작아진다고 생각했다.

1992년 8월 연합통신이 러시아 군 역사연구소 연구원으로부터 입수한 ‘조선인민군 제1 타격계획 작전지도’. 중부 전선의 북한군이 서울 남쪽에서 국군 퇴로를 차단한 뒤 포위 공격하는 작전이 표시되어 있다.

무산된 ‘수도권 포위 섬멸 작전’

‘북한군 서울 3일’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북한의 남침 구상을 볼 필요가 있다. 남침 개시 직전인 6월 22일 작성된 것으로 개전 후 북한군에게서 노획한 문서 ‘북한군 정보계획’에 따르면 남침은 3단계로 진행된다.

1단계 방어선 돌파 및 주력 섬멸
2단계 전과 확대 및 예비대 섬멸
3단계 소탕작전 및 남해안 도달

핵심은 1단계로 서울을 점령한 주력군과 춘천 원주 등을 점령하고 국군의 후방으로 온 북한군이 수원 이북에서 한국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다. 그 후 남해안까지 3개 방향으로 진격한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북한군 1군단 등 주력 부대가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중부 전선의 북한 2사단과 7사단은 원주와 홍천을 점령한 뒤 남쪽 후방에서 한강 이남 지역을 봉쇄 포위해야 한다. 계획대로 진행돼 수도권에서 국군 주력을 섬멸하면 1개월 이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북한은 생각했다. 미국이 개입할 시간을 주지 않는 속전속결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작전이 차질을 빚은 것은 작전상 주공(主攻)이 아닌 조공(助攻)을 맡은 중부 전선에서 발단이 됐다.

국군 6사단의 서전(瑞戰), 춘천 홍천 전투

북한은 서부전선에서 1군단 등 주력이 서울을 공략하는 동안 중부 전선인 춘천〜홍천에서는 조공 부대를 우회 남진시켜 수도권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세웠다. 수도권 포위 섬멸 작전이다. 춘천 홍천 지구는 국군 제6사단(청성부대)이 맡고 있었는데 북한 정예 2군단을 맞아 선전하면서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남도현, 47쪽)

6사단이 춘천에서 사흘, 홍천에서 이틀을 버텨 30일까지 북한군을 저지한 뒤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 북한군은 ‘수도권 섬멸 작전’에 투입되는 타이밍을 놓치게 됐다.

중부 전선으로 내려온 북한군은 2군단 예하 2사단과 12사단이었다. 6사단은 7연대가 옥산포, 19연대가 홍천 말고개에서 육탄돌격까지 감행하며 적의 자주포를 막아냈다. 사단의 제16포병대대는 춘천과 홍천을 오가며 맹활약했다.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에 방문객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춘천=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