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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죽미령에서 다부동까지 ‘피(血)로 버틴 지연작전’(1)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6회]낙동강 방어전선(1)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의 ‘시계 조형물’에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 15분까지 전투가 벌어진 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오산=구자룡 기자

경기 오산시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전투가 벌어진 1950년 7월 5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15분까지를 표시한 시계 조형물이다. 당시 세계 최강국 미국과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북한 괴뢰 집단’간 첫 전투치고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더욱이 미군은 북한군에 겨우 반나절 가량 버틴 패배였다. 9월 초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를 거듭한 ‘지연작전’의 시작이었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의 구 ‘유엔 초전 기념비’. 스미스 부대원 숫자인 약 450개의 돌을 쌓은 모습이다. 오산 =구자룡 기자

한나절 전투에 병력 3분의 1 손실된 대패

맥아더는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뒤 바로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한국군의 방위 능력은 이미 소멸해 북한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맥아더, 169쪽). 맥아더가 처음 투입한 부대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24사단.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규슈 구마모토에 있던 21연대 1대대(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첫 미 지상군으로 긴급 투입됐다.

7월 1일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시민환영대회를 받은 후 2일 대전을 거쳐 오산 북쪽 5km 지점의 죽미령에 도착한 것은 5일 오전 3시였다. 도로는 후퇴하는 국군과 피난민들로 가득 차 인파를 역류하면서 올라갔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의 ‘유엔군 초전기념비’. ‘초전’은 6·25 전쟁에서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 장소라는 의미다. 오산=구자룡 기자

오전 8시 후방에 배치된 52포병 대대가 북한군 선두의 T-34 탱크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전위부대는 대전차포와 무반동총을 발사했다. 탱크 4대가 파괴되었지만 다른 29대는 방어선을 돌파해 줄지어 내려왔다. 스미스 대대는 후방의 사단 본대와 통신망도 구축하지 못한 채 전투를 벌였다. 기상 상태가 안 좋아 공중 지원도 받지 못했다. 결국 전투 시작 6시간 여 만에 퇴각, 철수했다. 병력이 분산돼 포위 공격을 받았다. 모든 공용화기는 챙길 틈도 없었다. 부대원이 천안에 집결했을 때 전사 부상 실종 등 인원 손실이 150여 명으로 450여명 스미스 부대원의 3분의 1에 달했다.

죽미령 전투 전사자 중에는 나이 어린 10대 소년 형제도 있었다. 랜섬과 버질 월포드는 각각 14살과 16살에 군에 입대해 죽미령 전투 때는 16살과 18살이었다.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해 어린 나이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미군은 이들 형제를 되돌려 보내려 하던 중 죽미령 전투에 참전했다가 형제 모두 목숨을 잃었다.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에 세워진 스미스 부대원 450여명의 이름을 새긴 ‘워터 커튼’. 오산 = 구자룡 기자

서로를 모르며 벌였던 초전(初戰)

정일권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대전에 도착한 스미스 부대를 처음 보고 실망했다. 북한 T-34 탱크를 제압할 대전차 무기가 없는데다 실전 경험자도 부대원의 6분의 1에 불과했다. T-34 탱크는 미군이 발사한 대전차 포탄을 ‘고무공을 튕겨내듯’ 했다.(정일권, 1986, 54쪽).
미 24사단은 3개 연대 중 한 개 연대는 일본에 남겨두고 왔다. 부대원들은 여름용 군복을 준비하라고 했다. 초전에 북한군을 격파한 뒤 서울에서 개선 행진을 하려면 여름용 군복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북한군을 얕보고 준비가 안이했다.(핼버스탬, 208쪽)



미 지상군이 북한군과 처음 전투를 벌였던 죽미령에 세워진 ‘유엔군 초전(初戰) 기념관’ . 유치원 아이들이 견학을 왔다. 오산 = 구자룡 기자

미 육군 사례로 연구되는 죽미령 전투
 
죽미령 전투는 미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 전사 교육에서 연구 사례라고 한다. 상대에 대한 정보없이 얕잡아보고 전투에 임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하는 전투로 꼽힌다.(남도현, 106쪽). 미군은 자신들이 참전한 것을 알면 겁먹고 전투를 포기할 것이라는 자만도 있었다.

북한은 미군과의 첫 전투에 대해 ‘조선인민군 불패의 위력을 온 세상에 시위하였으며 이른바 세계 최강을 자랑해 온 미제 침략군의 거만한 콧대를 꺾었다’고 자평했다. (이상호, 171~3쪽)

죽미령 전투는 패배했지만 북한군이 예상했던 시기보다 훨씬 빨리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해 주력 부대의 남진 속도를 늦춰 미군 후속 부대를 전개하는 시간을 확보하게 했다. 맥아더는 북한군이 한반도 전역을 수중에 넣기 전에 전진 속도를 늦추기 위해 소규모라도 신속하게 지상군 부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적 사령관이 조심하게 될 것이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으로 봤다.(맥아더, 173쪽)

낙동간 전선에서 포로가 된 한 북한군 장교는 “미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해 들은 바 없었는데 오산에 미군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우리로서는 충격이었다”고 진술했다.(‘1129일간의 전쟁’, 541쪽). 비록 기습 남침을 받아 밀리면서도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줄이는 ‘지연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자료 : ‘6·25 전쟁 1129일’(이중근 편저)

연대장 사망, 사단장 피랍, 대전전투 패배

죽미령 패배 후 미 24사단은 천안에서 34연대장을 로버트 마틴으로 교체 투입했는데 그는 2.36인치 로켓포를 들고 직접 T-34 탱크로 달려갔다가 탱크 총격에 사망했다. 미 24사단이 19일 대전까지 밀려왔을 때는 북한군 3,4사단과 105전차사단이 3개 방면에서 공격해 왔다. 윌리엄 딘 사단장은 직접 3.5인치 대전차포를 들고 전차사냥에 나섰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이틀 만에 대전을 북한군에 내줬다. 딘은 철수 과정에서 야간에 부상병에게 물을 떠다주려다 산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그는 부대와 헤어진 뒤 실종됐다가 포로로 잡혔다. 그는 휴전 후 포로 교환으로 돌아왔다. 24사단은 7월 21일 후퇴하면서 옥천 전투에서도 패배해 첫 전투 이후 보름여 만에 1만6000명 병력 중 약 7000명을 잃었다.


윌리엄 딘 미 24 사단장

구자룡 기자·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