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그들은 왜 낯선 땅에서 피를 뿌렸나”(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7회]파병 16개국의 사연(1)

경기 파주의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에 새겨진 벽화. 집에 돌아온 장병이 가족과 만나는 모습이 애틋하다. 파주=구자룡 기자

경기 파주군 적성면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의 벽면 부조물에는 무사히 귀환한 남편를 꼭 안고 안도하는 아내의 표정과 뒤에서 아빠의 바지를 잡고 기뻐하는 딸의 모습이 있다. 하지만 이 병사처럼 집으로 돌아와 다시 가족을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6·25 전쟁 기간 영국군은 전사 1078명, 실종자도 179명이었다.

경기 파주의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에 새겨진 글로스터 대대원들. 설마리 전투에서 10배가 넘는 중공군에 포위 고립됐던 이들 중 일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을 것이다. 파주=구자룡 기자

옆 부조물에는 이곳 전투에 참가한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원들 12명이 활짝 웃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도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6·25 전쟁 3년간 전투병을 보낸 16개 참전국 장병 3만7886명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로 길게는 한 달 가량 배를 타고 와 낯설은 곳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인적도 드문 파주의 감악산 자락에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고 세워놓은 추모와 감사의 비석만으로는 그들의 희생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파주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에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참전 용사에게 바치는 문구가 쓰여있다. 왼쪽 베레모는 이 전투에 참가한 글로스터 대대가 과거 1801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것을 기념한다. 파주=구자룡 기자


“미국과 공동 책임” 의식한 영국

영국은 1950년 1월 가장 먼저 신중국을 승인하고 중공과의 대립을 원하지 않았다. 자국이 총독 통치를 하고 있던 홍콩 때문이었다. 영국은 중공의 대만 점령 주장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 중국과 전면전을 일으킬 수 있는 이른바 ‘확전’에 영국은 가장 반대했다. 그렇지만 일단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책임을 다했다.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전투 병력을 미국에 이어 가장 먼저 한반도에 투입했다. 육군 파병 규모도 미국 다음으로 많았고 해군도 항모 1척을 포함 17척을 파견해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희생자도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

파주 영국군 설마리 전투비. 주변의 돌을 쌓아 4개의 비를 부착했다. 위쪽 두 개는 유엔기와 영국군 부대 표지, 아래는 한글과 영문으로 1951년 4월 설마리 전투 상황을 기록했다. 파주=구자룡 기자

영국은 18개월이던 군복무 기간을 2년으로 늘려 연인원 5만6000여명을 보냈다. 영국은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과 영연방군을 편성해 설마리 전투, 가평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영국은 1951년 7월 ‘영연방 1사단’을 창설했는데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참가한 것으로 ‘다국적 사단’은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다.(UN군지원사, 176쪽).

미국은 1950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유럽부흥계획에 따라 28억5000만 달러를 지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영국은 한국 전쟁에 지상군을 파병해 미국의 영국에 대한 지원이 축소되지 않기를 원했다.(김계동, 100쪽)

참전 동기와 계기는 달라도 명분과 목적은 하나 ‘평화유지’

6·25 전쟁에 전투와 의료 지원을 위해 파병한 각 국가의 목적과 경위는 다양했다. 하지만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후에는 불법 침략 세력의 격퇴라는 목적은 같았다. 각 국은 낯설고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나라에 전투병을 보내기 위해 부대를 새로 만들고 병력을 모집했다. 의무 복무 기간을 늘려 병력을 충원했다. 많은 국가에서는 참가하겠다는 자원병이 넘쳐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했다.


경기 파주 임진각의 미국군 참전기념비. 파주=홍진환 기자


16개국 파병, 4개국은 육해공 모두 보내

유엔 안보리는 6·25 전쟁 발발 이틀만인 6월 27일 군사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7월 7일에는 유엔군사령부도 창설됐다. 파병 결의안이 통과되고 유엔군 사령부 창설 1주일이 지났지만 미국 외에 지상군을 파병하겠다는 국가가 없었다. 트뤼그브 리 유엔사무총장은 7월 14일 52개 회원국에 파병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미국은 6월 27일 해군과 공군이 평양까지 공습을 시작됐다. 일본에 주둔해 있던 육군 제24사단의 스미스 특임대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해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첫 전투를 벌였다. 미국 다음으로 육군이 도착한 것은 영국으로 8월 28일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다부동 전투가 한창이던 때다. 당시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던 자유중국(대만)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3만3000명의 지상군 파병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쟁 3년간 16개국이 전투 병력을 파견했다. 육해공군을 모두 파견한 국가는 미국 호주 캐나다 태국 4개국이다.

6·25 당시 독립국가 93개국 중 60개국이 전투, 의료, 물자지원 등으로 참여했다. “인류 역사상 단일 연합군으로 한 나라의 자유와 민주를 지키기 위해 참전한 규모로는 최대였다.”(국가보훈처 유투브 ‘역사다방’·2021년 11월)

부산의 유엔공원묘지는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다. 매년 11월 11일 11시에 1분 동안 부산 향한 묵념 행사 ‘turn toward Busan’이 진행된다.

부산 유엔기념공원

※참전병력은 육해공 해병대를 포함한 연인원 기준. 미국 영국은 사망 외 실종자 3,737명과 179명 추가.
※도착은 육군 기준, 육군 없는 남아공은 공군
자료 : ‘통계로 본 6·25 전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프랑스, 전후 복구와 혼란 속 대대 규모 파견

경기 양평군 지평면의 ‘지평리지구 전투전적비’ 앞 좌우에 프랑스군과 미군의 전승충혼비가 좌우에 있다. 미 2사단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주축이 됐음을 보여준다. 지평리 전투는 미국 영국 프랑스의 육군사관학교 교재에 전술 토론 자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양평=구자룡 기자

프랑스는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점령당해 괴뢰 정부의 통치를 받는 등 전쟁의 폐허상태에서 겨우 회복되고 있는 때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과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군예산은 상당한 압박을 받았다. 유엔의 5개 상임이사국 중 한 나라였지만 걸맞는 책임을 떠안을 여유가 없었다.(베르고, 38쪽) 프랑스는 2차 대전이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싸운 경험이 있는 예비역들로 대대 단위 부대를 만들어 보내기로 했다. 프랑스 대대는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1950년 8월 창설됐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를 이끈 몽클라르 중령. 실제 계급은 별 셋의 중장이었으나 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스스로 계급을 낮췄다. 출처 지평리 전투기념관

프랑스의 참전 부대를 이끌고 온 랄프 몽클라르 중령은 ‘1차 대전의 영웅’ 칭호까지 받은 3성 장군이었다. 2차 대전 때는 ‘망명 자유 프랑스군’을 이끈 레지스탕스 지휘관이었다. 몽클라르는 가명이었다. 몽클라르는 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계급을 낮춰 중령급이 맡는 대대장을 자원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