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그들은 왜 낯선 땅에서 피를 뿌렸나”(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7회]파병 16개국의 사연(2)
참전 계기로 나토 가입한 튀르키예와 그리스
6·25 전쟁이 발생하자 튀르키예에서는 ‘형제의 나라에 전쟁이 났으니 돕자’는 분위기가 일었다. 1만5천여명이 자원했는데 고등학생들도 참가시켜 달라고 시위를 벌였다.(국가보훈처 유투브 ‘역사다방’·2021년 11월). 튀르키예는 나토에 가입하기를 원했는데 전쟁은 전공을 세워 나토 가입의 명분을 내세울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튀르키예는 전쟁 중인 1951년 9월 20일 나토 창설 멤버 12개 국가 외에 처음으로 그리스와 함께 가입됐다.
그리스 참전 부대 이름은 ‘스파르타 대대’. 그리스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소련과 그 위성국의 지원을 받는 국내 공산당 세력과 6년간 내전을 치르고 있어 공산군의 침입을 받은 한국에 동질감을 느꼈다. 참전비 좌우의 기둥과 동판에 새겨진 월계수잎이 고대 문명국가 그리스가 우리와 생사를 함께 하며 싸웠음을 보여준다.
경기 여주 시내 공원에 있는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는 좌우 기둥이 그리스 신전 기둥으로 낯익어 멀리서도 그리스 기념비임을 알 수 있다. 여주=구자룡 기자
그리스군 참전 기념비 앞 동판에 새겨진 월계수와 투구. 여주=구자룡 기자
영연방 국가들 :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경기도 가평의 영연방 전투 기념비. 태극기 유엔기와 함께 영연방 4개국 국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다. 가평=구자룡 기자
호주는 유엔 결의안 직후인 6월 30일 마침 일본 극동군사령부에 파견 중인 2척의 함정과 1개 보병대대가 있어 파견을 유엔에 통보했다. 호주 국내에서도 자원병을 모집했는데 정규군의 98%가 지원 의사를 밝혀 심사를 거쳐 선발했다. (‘6·25 전쟁 참전사’, 136쪽)
1951년 10월 경기도 연천의 ‘마량산 전투’에서는 ‘능선 방향 공격’ 전술을 구사했다. 능선 을 달리며 공격하는 것은 적에게 노출이 쉬워 위험하지만 신속한 기동이 가능하다. 산악 기동에 장점이 있다는 중공군도 혼비백산했다고 한다.(국가보훈처 유투브 ‘역사다방’·2021년 11월). 호주는 가평 전투에 영연방군 일원으로 참여했는데 자국 현충일인 4월 25일(1차 대전 당시인 1915년 뉴질랜드와의 연합군이 튀르키예 해안에 상륙했던 날)의 하루 전날을 ‘가평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1129일의 전쟁’, 342쪽)
뉴질랜드 참전 기념비. 출처 국가보훈부
뉴질랜드 육군은 7월 27일부터 부대 명칭을 ‘한국부대(K-Force)’로 명명하고 파병부대원을 모집했다. 모집 9일 만에 다수의 원주민 마오리족을 포함, 전국에서 5천982명이 지원했다. 캐나다는 6·25 전쟁이 터졌을 때 한국과 서로 대표부도 설치되지 않은 관계였지만 의회가 만장일치로 파병을 결의했다. 생 로랑 총리는 “참전은 특정 국가를 상대로 한 싸움이 아니라 유엔의 평화 회복을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밝혔다.(‘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6·25전쟁 참전사’, 26쪽)
아시아의 우방국 태국과 필리핀
태국은 2차 대전 시 추축국인 독일 일본과 같은 진영에서 싸워 6·25 전쟁을 통해 국제사회의 신뢰를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빨리 파병했고 가장 오래 머물러 1972년 철수했다. 파병 당시와 철수할 때의 부대장이 부자간이어서 화제가 됐다.
소총 개머리판 모양의 참전비와 군인 민간인이 함께 걷는 동상이 인상적이다. 출처 국가보훈부
필리핀은 6·25 전쟁 4년 전 독립한 뒤 공산 반란군과 교전 상태에 있어 국내 정세도 매우 불안했다. 그럼에도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나자 공산군 토벌 작전에 투입된 10개 대대 중 한 개 대대를 빼내 한국에 보냈다.(‘UN군 지원사’, 295쪽)
필리핀군 항전 기념비 기단에는 50명이 부조되어 있는데 이는 절망과 좌절을 딛고 일어난 한국 국민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출처 국가보훈부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