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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한국을 구한 맥아더의 집념, 인천상륙작전(1)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8회] 

인천 옹진군 영흥도의 해군 전적비에 해군과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전사자 1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 9월 14일과 15일 전사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대부도와 선재도를 지나 도착하는 영흥도는 시화방조제로 직선 도로가 뚫렸어도 인천항에서 자동차로 1시간 20분 가량 걸리는 곳. 여기에 세워진 ‘해군 영흥도 전적비’ 아래에는 임병래 중위 등 해군 8명과 대한청년단방위대원 6명 전사자 명단이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눈길을 끈 것은 이들의 사망 날짜. 1950년 9월 14일과 15일, 인천상륙작전 전날과 당일이다. 맥아더가 이끄는 미 10군단 주도의 유엔군 인천상륙작전이 순조롭게 이뤄진데는 한국 해군과 민간인 청년 대원들이 희생을 무릎쓰고 인천 앞바다 길을 열어 놓은 것도 큰 기여를 했음을 보여준다.

인천 웅진군 영흥도에 세워진 ‘해군 영흥도 전적비’.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상륙전 인천 앞바다 정지 작업과 양동 작전

영흥도는 인천항으로 가는 유일한 해로인 비어수로(飛魚水路)의 입구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상륙작전을 앞두고 해군은 8월 18일과 20일 덕적도와 영흥도를 차례로 탈환했다. 적 40명을 사살하고 100여명을 포로로 잡는 과정에 아군도 4명이 전사했다. 이중 박동진 중사의 이름을 딴 유도탄 고속정도 진수됐다.

미군 유진 클라크 대위가 이끄는 ‘클라크 첩보대’는 9월 1일부터 영흥도를 거점으로 청년단을 조직하고 켈로(KLO) 부대와 함께 월미도, 인천 및 서울 시내까지 대원을 파견해 북한군의 해안포대 수량 및 배치, 북한군 병력 상황 등을 파악하는 ‘x-ray 작전’을 수행했다. 그런데 상륙작전 직전인 14일 북한군 1개 대대 규모 병력이 영흥도를 기습했다. 소수만 지키고 있다가 대부대의 공격을 받아 피해가 컸다.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대원은 다른 대원들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퇴각하지 않고 남아 적과 맞섰다. 둘만 남은 뒤 포로로 잡힐 경우 상륙작전 비밀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남겨 두었던 총알로 자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였던 인천 팔미도 등대로 오르는 길. 맥아더와 인천상륙작전에서 함포 사격을 하는 군함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클라크 첩보대와 KLO 부대는 상륙작전 전날 비어수로를 비추는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는 ‘트루디 잭슨 작전’을 무난히 수행해 15일 0시 30분 등대를 점화했다. 상륙작전을 시작하라는 ‘봉화’를 올렸다.

1903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팔미도 등대(왼쪽), 100주년인 2003년 퇴역했다. 인천상륙작전 때는 상륙함대가 진입하는 비어수로를 비췄다. 우측은 신축 등대.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맥아더는 상륙 사흘전인 12일 미영(美英) 혼성 부대가 군산에서 소규모 상륙작전을 벌이도록 했다. 하루 전날에는 삼척에서 함포 사격을 실시했다. 상륙 당일에는 포항 북쪽 낙동강 방어선의 북한군 뒤편 장사동에서 ‘명작전’으로 불리는 학도병 주도의 상륙 양동작전을 벌였다.

하늘에서 드론 촬영한 인천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멀리 인천항과 앞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다. 인천 = 홍진환 기자


상륙작전보다 더 어려웠던 내부 설득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8월 23일 도쿄에서 열린 전략회의가 열렸다. 맥아더는 콜린즈 육군참모총장 등 다른 참석자들은 “토의가 아니라 계획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려고 했다”고 회고했다(맥아더, 189쪽)

해군은 조수와 지형이 상륙에 위험하다, 썰물 때는 과거 수백년간 황해에서 밀려와 쌓인 진흙이 부두에서 2마일까지 뻗쳐 있다. 비어수로는 조수가 6노트 속력으로 드나든다. 기뢰를 부설하기 좋고, 취약 지점에 배가 침몰하면 다른 배가 통과하기 힘들다. 수륙양용부대가 월미도를 2시간 이내에 무력화해야 한다. 오후 밀물 이후에는 밤을 보낼 교두보를 확보해 다음날까지 견뎌야 한다. 반대하는 이유가 끝이 없었다.
육군은 현재 전투지역에서 너무 멀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제1 해병 여단을 빼면 방어선이 위태로워진다. 서울을 탈환해도 미 8군과 연계되기 어려워 상륙부대가 고립될 수 있다. 차라리 군산으로 상륙하자. 맥아더는 “인천으로 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령관을 임명하라”고 버텼다.

인천 연수구의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입구. 왼쪽 나무는 ‘맥아더 장군 나무’로 명명됐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맥아더의 비서 로우니는 “맥아더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벌어졌던 세계 역사상의 주요 전쟁에 대해 6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며 인천상륙 작전의 필요와 성공 가능성을 설득해 동의를 받아냈다”고 했다. 그는 회의 후 참모들에게 “인천상륙작전은 세계 역사를 통틀어도 22번째 위대한 전투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로우니, 58쪽)

맥아더는 “북한도 인천상륙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오히려 기습을 해야 한다. 군산은 상륙해도 방어선 좌측에 병력을 조금 보태는 의미밖에 없다. 인천을 거쳐 서울을 점령해야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고 주장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아니면 희생을 내는 전투를 무한정 계속해야 한다. 여러분은 장병들을 도살장 소처럼 피비린내나는 방위선에 두기 원하는가? 이 순간에도 운명의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상륙작전은 반드시 성공하고, 10만의 생명을 구할 것이다.”(맥아더, 195쪽)


인천 연수구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의 ‘자유 수호의 탑’.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