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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한국을 구한 맥아더의 집념, 인천상륙작전(2)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인천, 상륙에 불리한 요소 다 갖춰 ‘성공 확률 5000분의 1’

인천 앞바다 조수 간만의 차는 9m로 캐나다 펀디만의 20m를 제외하면 가장 크다. 간조시 개펄이 최대 4km여서 때를 못맞추면 개펄 수렁에 빠진다. 바닷가 모래사장은 없고 오히려 높은 방파제로 둘러져 있다. 해안 상륙이라지만 모래사장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공성전’ 같아서 인천은 방어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이었다. 상륙작전을 위해 ‘적색해안’으로 이름붙인 인천항에 상륙하는 해병대가 일본에서 제작해 가지고 온 알루미늄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모습이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외부에 조성된 ‘해벽을 넘어 상륙하는 미 해병대’ 조각상.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인천항으로 접근하는 해로는 비어수로 한 곳이어서 해안포나 기뢰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북한군 전차와 병력 2만 명 가량이 주둔해 있던 서울에서 인천은 30km 가량에 불과해 5,6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었다. 밀물은 12시간 간격이 있어 후속 부대가 오기전까지 첫 상륙 부대는 홀로 버터야 한다. 미 극동해군사령관 찰스 터너 조이 제독은 “해군 작전상 모든 지리적 핸디캡을 갖추고 있어 성공 확률은 5천분의 1”이라며 인천 상륙에 반대했다.

인천 월미도 진입로에 인천상륙작전 ‘적색해안 상륙지점’이 표시되어 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월미도로 가는 진입로에 세워진 ‘맥아더 길’ 표지석 .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상륙작전의 맹장 맥아더, 작전명 ‘크로마이트’

인천상륙작전 작전명 ‘크로마이트’는 보안을 위해 군사 작전을 전혀 연상시키지 않는 크롬 광석에서 따왔다. 상륙작전으로 ‘100-A’(낙동강 반격 후 군산 상륙), ‘100-B’(인천), ‘100-C’(군산), ‘100-D’(인천 상륙 후 주문진 추가 상륙) 등이 검토되었으나 맥아더의 집념과 판단으로 ‘100-B’로 결정됐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인천에서 상륙이 가능한 날짜는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세 날을 전후한 2,3일. 낙동강 방어선 전황이 급박해 가급적 빨리 결행해야 했던 것도 9월 15일로 낙점한 이유 중 하나다. 7월 21일 미 육군 7사단과 제1 해병사단이 상륙부대로 선발돼 10군단이 구성됐다. 한국군은 해병 1연대와 육군 17연대가 각각 미 해병 1사단과 7사단에 배속돼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인천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 인천 = 홍진환 기자

맥아더는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고 돌아간 뒤 7월 4일 사령부에 인천상륙을 위한 ‘블루하츠(BLUE HEARTS)’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7월 22일 상륙 예정으로 검토됐다. 그런데 북한군 남진 속도가 너무 빨라 7월 8일 중단을 지시했다.(이상호, 180쪽)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많은 섬들을 공략하면서 ‘아일랜드 호핑(island hopping·섬 건너뛰기)’ 방식으로 상륙 작전에 성공한 것이 50여회에 이르는 ‘상륙작전의 귀재’였다. 방어가 강한 섬은 건너 뛰고 방어가 약한 섬을 공략해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이다.

맥아더는 1945년 9월 일본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인천항으로 들어 올 때도 대부대를 인천에 상륙시킨 경험이 있다. 1950년 봄에는 주일 미군에 대해 일본 열도에서 대대급까지 상륙훈련을 시킨 적도 있다. 이런 다양한 상륙작전 지휘 경험이 6·25 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뒤집는 역사적인 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치밀한 육상과 항공 정찰을 통한 북한군의 동향 파악도 있었다.


“월미산 높이가 2~3m 낮아졌다” 맹폭 후 전격적인 상륙

해발 108m 월미도는 인천항을 둘로 나누며 내려다보고 있어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압해야 했다. 월미도에는 북한 제226 육전대 소속 1개 대대 500명 가량이 월미산 정상 송신소 인근에 주둔해 있었다.

‘그날을 기억하는 나무’. 월미산 공원에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포격에서 살아남은 나무 중 7그루를 ‘평화의 나무’로 선정해 보호하고 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팔미도 등대가 켜진 뒤 새벽 2시 미군은 월미도에 일제히 함포 사격을 가했다. 맥아더는 마운트 맥킨리호 함상에서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15일 오전 6시 33분 함포 사격이 멈춘 뒤 미 제1 해병사단 5연대 3대대 대원 150명이 월미도 북쪽 ‘녹색해안’에 상륙했다. 상륙 순간부터는 피아가 섞여 포격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휴대 장비와 무기만으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같이 상륙한 M-26 전차 9대의 지원하에 월미산 정상을 점령한 것은 상륙 20여분 만인 6시 55분이었다. 이어 오전 8시 월미도를 완전 장악했다.

인천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돌아온 월미산 정상. 작은 안내판만이 이곳이 인천상륙작전 당시 핵심 고지였음을 알게 한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같은 날 오후 5시 반 밀물 시간에 미 해병대가 현재 대한제분 앞 방파제 부근 ‘적색 해안’과 남쪽의 ‘청색 해안’에 상륙했다. 미군은 인천 시내를 남북으로 진격하면서 참호를 파고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을 고립시켰다. 이날 오후 8시 인천을 탈환했고 이튿날 오전 일찍 대부분의 북한군은 투항하거나 인천에서 철수했다.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은 단 하루 만에 성공을 거두었다. 아군 인명 피해는 전사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으로 예상의 20% 수준이었다고 한다. 15일 해병 제1사단이 상륙한 다음날부터 미 7사단이 뭍으로 올라왔다.

앞서 인천상륙을 위해 모두 261척의 군함이 일본 요코하마 사세보 고베 그리고 부산 등에서 출발했다. 부산에서 출발한 한국 해병 17연대 장교는 출발할 때까지도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고 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