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한국을 구한 맥아더의 집념, 인천상륙작전(3)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인천 탈환에는 하루, 서울 탈환에는 13일
북한군은 인천을 하루 만에 내주었으나 서울 방어에는 총력을 기울였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 7사단이 경인 남쪽 공격에 투입됐다. 인천에서 허를 찔린 사실은 낙동강의 북한군에도 전해져 18일부터 본격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38선까지 후퇴하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9월 26일 상륙부대 미 10군단과 낙동강에서 올라온 미 8군이 ‘초전 죽미령 전투’가 있었던 경기도 오산에서 랑데뷰했다.
서울 마포구 연희동 ‘해병대 104고지 전적비’. 서울 시내에서는 드문 전투 전적비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서울 방어에 인민군은 2만 여명이 투입됐는데 연희 104고지 전투가 고비였다. 하루 밤에도 2,3차례 뺏고 뺏기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연희 104고지’는 서울 시내에서는 드물게 6·25 전적비가 세워진 곳이다. 9월 28일 서울 수복은 기습 남침으로 뺏긴지 3개월 여 만이었다. 29일 오전 10시 맥아더 사령관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해 정오 중앙청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울을 돌려드린다”는 연설을 했다.
북한, 몰랐나 알고도 당했나
북한군에는 8월 26일 상륙작전 대비 지시가 내려왔다. ‘인천 방어지구 사령부’가 마련돼 9월 15일까지 방어 준비를 마치라는 것이었다. 월미도와 인천 항구에 포대도 설치됐다. 하지만 막강한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에 집중하고 있는데다 보급선도 길어져 다른 지역 상륙작전에 대비할 여력이 없었다는 분석이 많다.
중국은 개전 초기부터 후방 상륙작전을 경계하도록 북한에 조언하면서 인천과 원산을 지목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비서 레이잉푸(雷英夫)는 8월 초 일본에 파견돼 상륙작전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미군 부대가 상륙작전 훈련을 받고 있으며 일본 항구마다 미국과 세계 각 지에서 온 선박들로 붐빈다는 것을 확인했다. 레이잉푸가 맥아더가 인천을 선택할 확률이 높다고 보고한 것이 8월 23일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김일성에게도 전달했으나 인천항 폭파 등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핼버스탬, 462쪽)
북한의 ‘조국해방 전쟁사’에서 김일성은 인천을 점령했을 때부터 상륙작전을 예상하고 7월에는 방어를 강화하라고 했으나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김일성이 책임을 밑에 떠넘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이상호, 187〜9쪽)
인천상륙작전은 얼마나 공개된 작전인가
도쿄에서 맥아더 사령부를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서 인천상륙작전은 (언제 실행되는 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언제가 할 것으로 예상한) ‘누구나 아는 작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히긴스, 188쪽)
프란체스카 여사는 상륙작전 보안이 허술했다고 지적했다. “미 8군에 들어갔던 우리 경관 한 명이 미군 병사와 대화했는데 글쎄 이 병사 말이 ‘전쟁에 대해선 걱정 말아라. 2주일 내에 우리가 상륙작전을 벌여 공수부대로 적의 배후를 치게 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프란체스카 일기, 9월 6일자)
애치슨 국무장관은 “인천상륙작전이 일본에서는 ‘상식 작전(Operation Common Knowledge)’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사전에 정보가 누출됐는데 다행히 북한에는 전해지지 않았다”고 했다.(애치슨, 580쪽).
“비밀이 유지된 것은 새로운 병력배치를 목격하고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던 일선 종군기자들과 고국에 있는 편집자들이 군의 전략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덕분이었다.” 맥아더는 도쿄의 기자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알고 있었지만 보도하지 않고 도와줬다고 했다. 공격 개시 1주일전 마스터 플랜의 세부가 완성되어 있었는데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려면 사전에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상륙작전에서 사용된 알루미늄 사다리 제작 의뢰만 보고도 인천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보안을 지켰다고 한다.(맥아더, 195쪽)
▼ 맥아더와 대선 출마
“맥아더는 대통령이 되려고 5000 대 1의 기적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는 미군이 인천으로 상륙할 지를 두고 북한 군부와 도쿄의 맥아더사령부에서 각각 논란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공통점은 맥아더가 인천 상륙을 고집하는 목적이 대선 출마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속 북한군 인천지구사령관은 “미제는 성공 확률 5000분의 1로 생각하지만, 확률이 적은 인천으로 왜 오나. 바로 맥아더 그 늙은이가 영웅으로 남고 싶어서다. 맥아더는 대통령이 되려고 5000 대 1의 기적이 필요한 것이다.”
도쿄의 맥아더사령부에 모인 미 고위 인사들도 인천상륙 작전을 반대하면서 맥아더의 대선 출마를 거론한다. “맥아더는 사다리와 등대가 있으니 상륙작전 걱정이 없다고 한다. 인천을 노르망디 삼아서 대권에 도전하려는 거요!”
‘사다리’는 인천항구가 절벽이 높아 사다리가 필요했는데 일본에서 제작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된다고 한 것을 비꼰 것이다.
맥아더는 1944년 공화당 대선 예비경선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민주당 출신 루즈벨트 대통령을 싫어한 공화당 일부에서 출마를 권유했다. 그는 네브래스카주 공화당 의원 아서 밀러와 주고 받은 편지가 밀러에 의해 공개되면서 경선에서 중도 하차했다. 편지에는 아서가 “미국에서 자행되는 독재가 사람들의 권리를 파괴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맥아더는 “미국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의원님의 현실 인식이 진정한 애국자들을 일깨우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라고 화답했다. 현직 육군대장이 군 최고통수권자를 향해 ‘독재’라고 하는 말에 맞장구를 친 것이다.
앞서 맥아더는 필리핀 근무 시절 자신의 참모를 지냈던 아이젠하워 육군참모총장이 1946년 5월 도쿄를 방문했을 때 아이젠하워에게 차기 대선 출마를 권유했다. 아이젠하워도 맥아더에게 출마를 권유하자 “나이가 많다”고 고사했다. 그러면서도 1947년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제안이 오면 수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핼버스탬, 186쪽)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 작전 실패에도 대선 출마가 거론된다.
1950년 11월 ‘그리스마스 때까지 귀국!’이라는 구호가 맥아더라는 개인 광고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고안됐다는 것이다. 미 대선(1952년 11월)을 앞두고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웨인트라웁, 37쪽)
1950년 10월 트루먼과의 웨이크섬 회담 중에도 트루먼이 대선 출마 의향을 물었다. 맥아더가 정치적 야심이 있는지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저는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각하에 대항할 장군이 있다면, 그 이름은 아이젠하워지 맥아더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웃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아이젠하워를 좋아한다고 대답하면서도 “아이젠하워는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랜트(남북전쟁 시의 북부군 총사령관)도 완전무결한 대통령의 견본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맥아더, 215쪽). 트루먼이 아이젠하워에 대해 낮게 평가했지만 2년 후 차기 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공화당 후보로 당선돼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이후 20년 민주당 집권을 끝냈다.
참고 문헌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1, 2권, 일신서적, 1993.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
에드워드 L. 로우니 지음, 정수영 옮김, 『운명의 1도』, 후아이엠, 2014.
스탠리 웨인트라웁 지음, 송승종 옮김,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작전』, 북코리아, 2015.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