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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中, ‘정의롭지 못한’ 6·25 전쟁 참전(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10회]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에 관람객들이 줄을 길게 서 있다. 북중 접경 도시 단둥을 보려온 관광객들이 기념관도 찾는다. 인원 제한을 위해 미리 등록을 받으며 관람료는 무료. 단둥 = 홍진환 기자
김일성과 박헌영이 1950년 10월 1일 마오쩌둥에게 보낸 구구절절 참전을 요청하는 편지.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이 편지를 통해 중국은 북한에 “이런 요청을 받고 도와준 것을 잊지 말라”고 환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적들이 오늘 우리가 처한 엄중하고 위급한 형편을 이용하여 38도선을 침공하게 되는 때에는 우리 자체의 힘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적군이 38도선 이북을 침공하게 될 때에는 약속한 바와 같이 중국 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절대로 필요하게 됩니다.”
북한 신의주 압록강 건너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항미원조기념관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연명으로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보낸 긴급 파병 요청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국군이 38선을 넘은 10월 1일자다. 박헌영은 이 편지를 직접 들고 베이징(北京)으로 달려갔다. 이날 스탈린도 마오에게 참전을 강력히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물론 중공군의 참전이 김일성의 ‘구명 요청’ 편지 한 장으로 결정될 것은 아니었다. 여러 우여곡절과 마오 나름대로의 계산에 따라 이뤄졌다. 그럼에도 6·25 전쟁의 큰 흐름을 바꾼 중공군 개입의 분기점에 이 편지가 있다.
마오의 ‘파병 의지’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중국 지도부의 6·25 전쟁 참전 논의 장면. 중공군 참전은 한반도가 분단 상태로 머물고 있는 현실과도 무관치 않다. 따라서 참전을 결정한 이 장면을 보는 한국인의 심정은 불편하고 착잡하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중국은 6·25 발생 10여일 후인 7월 7일 동북변방군을 편성해 25만의 병력을 배치했다.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압록강을 넘은 파병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베이징(北京) 지도부내에 반대가 많았고 스탈린이 ‘항공 지원’을 해줄지도 변수였다.
1일 김일성의 편지와 스탈린의 전문을 받은 마오는 이튿날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서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마오는 참전을 주장했으나 다수가 반대해 마오는 “당분간 참전할 수 없다”는 뜻을 모스크바에 보냈다. 그러면서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3일 파니카 주중 인도대사를 만나 “미군이 38선 넘으면 중국은 관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내부 전시관 초입에 있는 마오쩌둥과 펑더화이가 악수를 하는 대형 동상. 뒤로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돕고, 가족과 나라를 지킨다’는 중공이 내세운 참전 명분이 적혀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마오의 전문을 받은 스탈린은 5일 “중소의 연합세력은 미국보다 강하다”며 참전을 독려했다. 중공이 참전을 머뭇거리면 북한에 파견한 소련 인원을 철수할 수도 있음을 내비치며 강온 양면 전술을 구사했다.
파병 의지가 있었던 마오가 꺼낸 카드는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지방에서 마오의 긴급한 부름을 받고 올라온 펑은 “미국은 호랑이다. 결국은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언제가 잡아야 한다면 빨리 잡는 것이 좋다”며 파병을 주장했다. 펑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에 지명되자 “설령 전쟁으로 우리 국토가 황폐해지더라도 국공내전 승리가 몇 년 지연됐다고 여기면 된다”고 했다. 8일 마오는 군에 참전 준비 명령을 내렸다. 이날 흑해 휴양지 소치에서 휴양중인 스탈린에게 저우언라이와 린뱌오(林彪)를 보내 자신의 결심을 전달했다.
중국 단둥의 ‘끊어진 압록강 다리’위에 설치된 대형 석조 달력. 1950년 5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관)’ 펑더화이가 압록강 대교를 건너 북한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항공 지원 거절’에도 ‘반기(反旗)’ 접은 마오
저우언라이가 스탈린을 면담한 다음날인 10일 뜻밖의 소식이 마오에게 전해졌다. 스탈린과 저우언라이가 공동 명의로 “소련 공군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당분한 출동할 수 없다. 중소 모두 당분간 조선에 출병하지 않는다. 김일성에게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토록 할 것이다”라는 전보를 보내왔다. 그러면서 “소련 공군 지원은 2개월 후에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공군이 미미해 막강한 미군의 공군 화력에 제물이 되면서 파병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스탈린은 중국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정작 소련은 항공기 파견을 서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마오는 분노했다.(판초프, 547쪽)
마오는 12일 스탈린에게 북한에 파병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군에도 8일 명령을 철회했다. 스탈린에 대한 반기이자 ‘티토’ 유령이 나타난 격이었다. 그런데 마오는 하루 만에 파병으로 돌아서 꼬리를 내렸다. 마오는 “김일성이 동북에 망명정부를 세우기 전에 참전해야 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중국 단둥 기념관 내부에 걸린 깃발들. 북한에서 중공군의 참전에 감사한다며 중조 우의를 굳게 다지자는 내용이다. 단둥 = 홍진환 기자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