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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中, ‘정의롭지 못한’ 6·25 전쟁 참전(3)[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소련은 중공군의 조기 파병 꺼렸다?

시기의 문제일 뿐 중공군의 파병은 예정된 것이었지만 왜 개전 후 4개월 가량 지난 시기에 파병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유엔군이 북진해서 산악지대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참전 효과를 높일 시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가 웨이크섬 회담 때 중공군 참전에 부정적이라고 트루먼에게 얘기할 때도 맥아더는 “중공군이 참전했다면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올 때가 더 적기였는데 오지 않았다”고 했다. 히긴스는 “중공이 1950년 6월과 9월 사이 개입했다면 거의 희생을 치르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마오가 왜 미국이 화력이 증강될 때까지 기다렸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했다.(히긴스, 232쪽).

소련이 중공의 조기 참전을 반기지 않았다는 시각이 있다. 10월에는 스탈린이 마오에게 참전을 압박했으나 초기에는 오히려 파병을 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스탈린이 전쟁을 통해 노리는 목표와도 관련이 있다. 중공군이 참전한 뒤 전쟁이 쉽게 승리로 끝나면 적화 통일된 한반도에 대한 중공의 공(功)이 커서 소련의 영향력은 중국보다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미국과의 전투에서 힘이 빠지고 소련에 대한 의존이 커지게 하기 위해 마오를 참전시키려는 스탈린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 이는 ‘스탈린 음모론’측의 주장이다.

초기와 달리 10월 스탈린이 마오에게 파병을 압박한 것은 유엔군이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 이후 38선을 넘어와 한반도 전체가 미국의 세력 범위에 들어가게 될 지도 모른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소련으로서도 중국의 출병은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선즈화, 414쪽). 중국이 조기에 참전해 승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스탈린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해 적대관계가 되게 하려는 스탈린의 목적은 달성됐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악수 사진. 단둥 = 홍진환 기자

 “중국 발전이 50년 후퇴해도 참전한다”
 
참전 결정이 공식적으로 내려지기 전에도 중국 지도부는 북한에 대한 참전 의지를 밝혔다. 8월 4일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하더라도 최후까지 싸울 수 밖에 없다”고 참전 방침을 정했다. 8월 20일 저우언라이는 “조선은 중국의 이웃이다. 조선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참전 의사를 공개적으로는 처음 암시했다.

녜룽전( 聂荣臻) 중공군 참모총장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발전이 50년 이상 후퇴해도, 저항하지 않으면 중국은 영원히 미국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며 참전 의지를 밝혔다. 녜룽전의 말처럼 참전 이후 중국은 약 30년간 국제사회 단절된 채 죽(竹)의 장막 너머에서 고립됐다. 스탈린이 중공군의 참전을 종용한 의도대로 미-중 관계는 적대적이 됐다. 중소간에도 분쟁이 계속됐다. 중공이 1979년 미중 수교까지 ‘30년의 고립과 쇠락’을 겪은데는 ‘정의롭지 못한 6·25 전쟁 참전’이 있었다.

6·25 전쟁에 대한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의 책략과 계산을 분석한 손튼 교수의 책. ‘마오쩌둥만 왕따됐다’는 것이 결론이다.

마오, ‘서방-소(蘇) 사이 양다리’, 결과는 ‘왕따’

마오는 2차 대전이후 세계 질서가 냉전으로 양극화하는 과정에서 소련과는 이념적인 동질성을 같이하면서 서구 국가와도 실리적인 관계를 맺는 ‘양다리 전략’을 구상했다. 국공 내전 시기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와 유사하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 모두 중국을 상대국과 떼어 놓기 위해 고심했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까지 승인해 미중을 적대관계로 돌려놓으려고 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대만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한반도 전쟁이란 선수(先手)를 쳤다. 그러면서 중국이 너무 빨리 참전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둬 중국에게 공이 돌아가지 않도록 고심했다.

6·25 전쟁에서 중국은 미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적대관계가 됐다. 서구 사회로부터는 죽의 장막으로 단절돼 투자와 개발 과정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서구와 다시 손을 잡기 전까지 수십년 동안 퇴보를 면치 못했다.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참가한 댓가로 마오쩌둥만 ‘왕따’가 됐다는 것이 손튼 교수의 시각이다.(손튼, 535쪽)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 병사 조각상. ‘어깨를 나란히 한 작전’이라고 밑에 쓰여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마오와 스탈린 누가 패자(敗者)인가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의 한 대학 교수가 2023년 5월 수업 중 “중국은 6·25 전쟁에서 하나를 얻고 아홉 개를 잃었다(一得九失·일득구실)”고 말해 누리꾼들이 항의했다. 이 교수가 언급한 9개의 ‘실(失)’ 중 미국과 대립 관계, 서방과 결별, 한국과 적대시 등 외부와의 고립이 3가지다. 대기근과 문화대혁명 유발은 중국의 퇴보를 불렀다고 했다. 이밖에 소련 의존, 수십만 군인 사망, 북한에 대한 통제력 상실과 북한의 핵위협 직면 등이다.

마오쩌둥도 후에 6·25 전쟁 참전을 후회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중국 잡지 염황춘추(炎黃春秋) 2013년 제12호에 따르면 마오는 1956년 9월 23일 베이징을 방문한 아나스타스 미코얀 소련 부수상과의 회동에서 “조선전쟁(한국전쟁)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스탈린이 마땅히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듬해 7월 5일 다시 미코얀과 만났을 때도 “스탈린과 김일성이 중국에 전쟁 개시 시기와 작전 계획을 고의로 감췄다. 중국은 피동적으로 연루됐다. 이것은 잘못됐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15년 6월 23일).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부주석 시절부터 줄곧 “중국군의 6·25 참전은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언급하는 것과는 다르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는 한국 전쟁 최대의 패자는 스탈린이라며 다른 해석을 내놨다. 스탈린이 부추겼던 중미 관계의 간격두기는 중소 관계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중국이 티토주의로 가는 것도 막지 못했다는 이유다. 전후 10년이 되지 않아 소련과 중국은 첫 번째 적수로 변한 반면 다시 10년이 지나기 전에 동맹 관계의 역전(미중 데탕트)이 이뤄졌다는 것이다.(키신저, 189쪽)하지만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다시 서방 세계와 나오기까지 치렀던 안팎에서 치렀던 댓가의 원인에 한국전 참전도 한 요인이라는 것은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 미 ‘제 2사단’과 한국의 오랜 인연

미 2사단 ‘인대언 부대’ 마크.

미 육군 제2사단은 한국군 6사단 만큼이나 6·25 전쟁 중 영욕이 극명했던 사단이다. 참전 1년도 안돼 적에게 네 번 포위돼 참패와 설욕전을 주고 받았다. 초기 군우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인디언 태형’이라고 불릴 만큼 참패를 당했으나 원주 전투와 지평리 전투에서 설욕했다. 이어 벙커고지 전투와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1차 대전 당시인 1917년 10월 26일 프랑스 브루몽에서 창설됐고 2차 대전 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사단 번호가 ‘2’인 것처럼 조기에 창설된 전통있는 부대다.

6·25 전쟁 때는 주둔지 워싱턴주 포트루이스를 떠나 선도 부대가 1950년 7월 23일 부산에 상륙했다.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밀려나고 있을 때였다. 미 제 2사단은 정예부대라는 이유로 맥아더가 10월 15일 웨이크섬에서 트루먼과 회담을 할 때 맥아더가 “전황이 좋아지면 철수시켜 유럽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고 언급한 부대다.

경기 파주 임진각의 미 2사단 참전비. ‘자유를 위하여 전사한 용사들을 위하여’라는 문구와 함께 1950년부터 한국에 주둔하고 있음을 표기했다. 파주 = 홍진환 기자

인디언이 부대기에 표시된 것처럼 별명이 ‘인디어 헤드’다. 2사단은 휴전 후인 1954년 9월 철수했다가 1965년 주둔지 교환으로 제1기병사단 대신 재배치됐다. 지금까지 줄곧 한국에 주둔해 있고 사단 본부도 한국에 있다. 한국전 당시 한국에 왔던 9개 사단 중 한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사단이다. 창설 이래 한국에 가장 오래 주둔했고, 절반 이상을 한국에 있는 유일한 미군 부대다. 2018년 평택으로 사령부가 옮기기 전까지 휴전선 최전방에 배치돼 ‘인계 철선’ 역할을 해왔다.

1976년 7월 1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미루나무 도끼 만행 사건으로 희생된 미군 2명도 2사단 장병이다. 2002년 6월 13일 여중생 두 명이 희생된 안타까운 사건도 2사단 훈련 장갑차에 치인 것이다.

참고문헌
데이빗 쑤이(徐澤榮) 지음,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옮김. 『中國의 6·25 戰爭 參戰』,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11.
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 『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
헨리 키신저 지음, 권기대 옮김,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 민음사, 2012.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