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중공군, 정교한 ‘덫’의 전술(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11회]
‘수풍댐 상류, 영하 10도의 압록강 물속으로 방한복과 신발 양말을 벗어 등 뒤에 묶은 반나체의 병사들이 걸어 들어갔다. 강을 건너왔을 때는 온몸에 얼음이 주렁주렁 매달려 은색 갑옷을 착용한 유령 같았다. 응급처치를 담당하는 여군도 마찬가지였다. 강이 얼어붙기 전 이렇게 수 만명이 건넜다. 주간에는 동굴, 기차 선로 터널, 탄광 갱도, 마을 초가집에 숨어 있다가 어두워지면 이동했다.’(웨이트라웁, 43쪽)
중공군은 북한에 들어온 뒤 미군의 공군력을 두려워해 야간에 병력을 이동시켰다. 낮에는 병사 한사람 한사람이 야산의 나무를 베서 등에 지고 이동하다가 미 공군기가 뜨면 그 나무를 세워 놓고 주저앉아 공습을 피했다. 산 가득히 나무를 태워 그 연기로 연막을 형성해 미군 조종사의 시야로부터 숨기도 했다.(백선엽 1권, 196쪽)
중공 항미원조지원군 훙쉐즈(洪學之) 제1부사령관은 “1950년 10월 19일 4개군과 3개 포병사단이 안둥(安東·이하 단둥), 창뎬허커우(長甸河口) 지안(集安) 3곳 다리를 건너 씩씩하게 조선으로 들어갔다”고 했다.(훙쉐즈, 64쪽). 하지만 많은 병력은 야음을 틈타 다리가 아닌 강물을 직접 건넜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압록강 단교’위에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병력을 이끌고 도강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참전 중공군을 ‘인민지원군’이라고 한 것은 국가가 전쟁에 나선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지원해서 나선 것이라는 의미다. 전국에서 연인원 120만 명 이상을 동원한 전쟁에 맞지 않는 ‘눈가리고 아웅’식 명분일 뿐이다. 단둥 = 홍진환 기자
‘13일의 재결정’, “압록강 다리 폭파 전 일거에 투입”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해 빠른 속도로 북진해 중공군의 참전은 시간 문제였다.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간 중공군 파병을 둘러싼 막판 신경전 끝에 파병이 최종 재결정된 것은 10월 13일 0시 이후여서 중국측 연구서는 ‘13일의 재결정’이라 부른다고 한다. 소련군 공군 지원이 없어 마오쩌둥이 갑자기 출병 중지 명령을 내리는 우여곡절이 있어 출병 날짜는 19일로 늦춰졌다. 초기 투입 병력은 1차 25만여 명, 2차 15만 명, 3차 20만 명으로 총 60만 명이었다.(이상호, 252쪽)
북한 파병 준비를 위해 단둥(丹東)에 온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훙쉐즈는 10월 7일 미군 전투기가 단둥이나 압록강대교를 폭격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전쟁 확대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후에 알았다. 그는 미군 전투기가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기 전에 4개군(군단)을 투입하기로 했다고 술회했다.(훙쉐즈, 53쪽)
중국 단둥의 압록강 단교, 강 중간부터 북한쪽으로 다리가 끊겨 교각만 남아있다. 강 건너편은 북한 신의주. 단둥 = 홍진환 기자
유엔군의 빠른 북진으로 작전 변경
중공군은 당초 압록강을 건넌 뒤 북한의 허리부분까지 진격해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했으나 유엔군 북진 속도가 빨라 작전을 변경했다. 압록강을 넘어오기 전부터 북쪽 산악지대에서 진지전과 기동전을 배합한 반격 습격 매복 등을 구상했다.(훙쉐즈, 68쪽).
미군은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산악지대에 숨어있는 것을 몰랐고 중공군은 미군과 국군이 압록강에 그렇게 빨리 도달할지 예상 못했다. 초반에는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후 상반된 대처가 전황을 갈랐다. 중국은 현대화된 장비와 해공군을 갖춘 미군과 정면 대결하기 보다 우회 공격과 분산, 은폐 등으로 대응했다.
<중공군의 미군 대응 전술 지침 >
- 지구전, 적 측면 우회 각개 격파
- 접근전, 야간전, 속전속결, 적의 강한 화력의 장점 발휘 방지
- 낮에는 병력 분산 은폐해 공습 회피
- 전투기 활동 제한되는 야간전투
- 폭격 우려있는 철로 도로 이동 회피
- 진지 매복후 북진하는 상대 공격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외부에 중공군 중포가 대규모로 전시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