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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중공군, 정교한 ‘덫’의 전술(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7차례 공세’를 알리는 신호탄 운산 전투

미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3차례나 당한 뒤였다. 1주일에서 보름 가량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공격을 해오다 일정 기간 휴지 기간을 지난 뒤 다시 공격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중공군 출병을 신고한 운산전투(1950년 10월 25일~11월 3일)에서 중공군에게 일격을 당한 뒤에도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실패하고 교훈을 얻지 못한 댓가는 ‘무사안일 북진’하던 미군과 국군의 전황을 훅 뒤집을 정도로 컸다.

운산전투는 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이 중공군과 처음으로 치른 전투다. 중국은 첫 전투가 벌어진 10월 25일을 참전 기념일로 삼고 있다. 중공군은 “미군의 최정예라는 제1기병 사단의 콧대를 꺾어 흥분되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훙쉐즈, 108쪽)

국군 1사단 15연대는 25일 금광으로 유명한 운산에서 박격포 세례를 받았다. 첫날 전투에서 35세 가량의 포로 한 명이 생포됐다. 두툼하게 누빈 무명 방한복으로 겉은 카키색, 속은 흰색이어서 눈이 오면 위장복도 됐다. 그는 자신이 제39군 소속으로 광둥성 출신이라고 밝힌 뒤 인근에 2만 명 가량의 중공군이 있다고 술술 털어놨다. 직접 신문한 백선엽 사단장은 미 8군을 통해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다. 도쿄 사령부는 조선족 의용병이 가담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15연대는 운산에서 ‘전투부대로서 존재하기를 멈췄다’고 할 정도로 괴멸됐다. 미 제8기병 연대도 중공군에게 포위돼 병력 과반수를 잃었다. 중공군 포로 한 명의 진술을 흘려버린 댓가였다.

중공군은 운산 전투 후 잠적했다. 병사들이 휴대한 식량과 탄약이 바닥나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중공군의 대규모 투입 사실을 모르는 것을 역이용해 더 큰 승리를 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했다.(훙쉐즈, 111쪽). 일시적 후퇴로 일종의 진공상태를 만든 다음 전투력이 더욱 우수한 적을 추가로 유인해 매복전술로 섬멸하려는 계략이었다. 중공군의 노림수는 적들에게 겁을 먹고 후퇴하고 있다는 그릇된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유엔군은 이런 중공군의 계략에 말려들었다. (웨이트라웁, 45쪽)

애치슨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0월 26일부터 11월 17일까지 3주일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재난으로 가는 것을 막을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고 했다.(애치슨, 602쪽). 1차 대공세 이후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중공군 각 부대의 출병 및 귀국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미끼 던지고 보름달 계산하고’, 정교한 덫
 
1차 공세 후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은 유엔군의 북진 속도가 느려진 것을 걱정했다.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는 적이 먼저 밀고 올라와야 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의도적으로 비호산, 덕천 등을 포기해 상대를 유인했다. 후퇴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작전이 노출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고 한다. 주력 부대는 10여km 후방에 있고, 소규모 부대로 기습공격을 해 공격개시선까지 쫓아오도록 했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운산 전투 후 바로 자취를 감추는 등 일부러 약하게 보이려고 했다고 했다. 적을 교만하게 만들어 깊이 유인하려는 전술이었다는 것이다.(펑더화이, 426쪽).

2차 공세를 앞두고는 핵심 정예부대를 ‘미끼’로 던졌다. 항일전쟁과 국공 내전에서 ‘철군(鐵軍)’으로 알려진 112사단을 적의 공격해 노출시켰다. 대비가 허술하다고 판단하고 적이 진격해 오도록 한 것이었다.

3차 대공세 전에는 달뜨는 시기를 살폈다. “보름달 뜨기 며칠전이 공격 개시에 가장 좋다. 전투가 최고조에 이를 때 보름달이 되어 가장 밝다.” 우리에게 신정 공세로 알려진 12월 31일 3차 공세 개시 날짜는 그렇게 정해졌다.(훙쉐즈, 192쪽).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채 안가고, 연말연시 경계심이 풀어진 틈을 이용하자는 계산도 있었다. 중공군은 밤에 산악을 이동할 때는 고무 군화를 신고 어두운 산허리를 소리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침입해 왔다.(리지웨이 회고록, ‘향군’ 3월호, 122쪽)

중공군이 70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5차 대공세를 편 것은 미군이 동해안 통천 원산 등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에 따라 반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38선을 치고 올라오면서 상륙작전으로 39도선의 안주~원산선으로 측면 공격해오면 주요 보급선이 차단돼 큰 위협이 된다고 봤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압록강 상류에 중공군이 도강했던 지점이라며 표지석과 병사들 동상을 세워놓았다. 뒤의 압록강에는 당시 임시 다리를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북한의 산악지대로 유인’

중공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할 때부터 유엔군을 북한의 산악지대로 유인했다는 분석도 있다. 중국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간 북한에 후방 역습을 경고했지만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는 미군이 북한까지 진격하도록 지상군 투입을 늦췄다는 것이다. 북한 최북단 산악지역에서 맞붙는 것이 중공군의 보급선도 짧고 방어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미리 투입해 중공군이 38선까지 내려간 뒤 미군이 함흥이나 남포 등 더 북쪽으로 상륙하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쑤이, 155쪽)

미군이 압록강으로 진군할 때 마오쩌둥은 “맥아더가 고집과 오만을 부릴수록 우리에겐 유리하다. 오만한 적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면서 미군이 최대한 북쪽으로 올라와 보급로에 문제가 생기기만을 기다렸다.(핼버스탬, 569쪽)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 육군 2사단 마크. 단둥 = 홍진환 기자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