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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중공군, 정교한 ‘덫’의 전술(3)[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미 2사단, 군우리 전투 ‘인디언 태형’ 굴욕
중공군의 ‘매복과 덫’의 전술에 처절한 패배를 당한 것이 군우리 전투다. 국군 6사단을 시작으로 미군과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한 직후부터 중공군의 맹렬한 기세로 이제는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 급급했다. 압록강에 처음 도달했던 국군 2군단 6사단은 초산에서 매복 포위당해 괴멸됐다. 7사단과 8사단 역시 중공군 공격에 하룻밤 사이 무너졌는데 두 사단의 사단장은 부대를 이탈한 뒤 서울 거리를 떠돌다 헌병에 체포돼 군법재판에서 무거운 판결을 받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일제히 북진할 때 호남지방을 돌며 후방 게릴라 잔병 소탕을 하던 미 2사단이 국군 2군단이 무너져 뚫린 곳에 급거 투입됐다. 미 2사단은 청천강변의 평남 개천군 군우리의 좁은 계곡에서 중공군 제42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미리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이 정찰을 맡은 전차 소대를 통과시켰고, 뒤따르는 헌병 정찰대와 수색중대 정찰대, 본대를 분리 타격했다.
군우리 전투는 적이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골짜기를 야간에 이동한 것부터 큰 실책이었다. 낮이라면 미군의 공군 및 화력지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야간에는 홀로 적과 맞서야 한다. 카이저 사단장은 곧 바로 현직에서 물러났다. 미군의 전사(戰史)는 카이저 소장의 실수를 상세히 기록해 교훈으로 삼는다고 한다. (백선엽 1권, 125쪽).
미 2사단은 앞뒤가 차단된 상황에서 계곡 위에서 집중 포격과 사격을 받아 사흘만에 병력의 20% 만이 살아남았다. 전투가 끝난 뒤 트럭과 장비, 야포와 각종 무기 그리고 막대한 양의 물자가 고스란히 중공군에 넘어갔다. 그중 상당수는 베이징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이 있는 최고 지도부에게도 전해졌다고 한다.(핼버스탬, 131쪽)
미 2사단의 부대 마크가 ‘인디언 헤드’이고 인디언들이 계곡 양측에서 공격하는 전술과 닮아 ‘인디언 태형’을 당했다고 미 전사는 기록한다. 군우리 전투(1950년 11월 29일~12월 1일)는 6·25 당시 미군의 사단급 부대가 당한 최악의 피해였다.(남도현, 279쪽).
남진(南進) 속도와 범위두고 공산측 내부 이견
미군이 중공군 공세에 38선 남쪽으로 철수한 것은 12월 16일이지만 중공군이 뒤따라 넘은 것은 열흘 뒤인 26일이다. 마오는 12월 4일 평양에 들어온 뒤 서울까지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펑더화이는 너무 멀리 내려가는 것은 보급선도 길어지고 유인 작전에 걸릴 수 있어 서울 점령은 북한군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쑤이, 248쪽).
1951년 1월 8일, 펑더화이는 부대의 진공을 멈추고 전군 2개월간의 재정비를 명령했다. 중공군이 38선을 넘고 서울을 재점령한 뒤에는 중공군을 남쪽으로 더 유인한 다음 육해공 공동 상륙작전을 펴서 독 안에 든 쥐처럼 만들려는 계획인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펑더화이는 “37도선에서 공격을 멈췄는데 우리를 낙동강으로 깊이 유인하려던 적은 우리 방어가 견고하게 완성되지 않은 것을 알고 1월 하순 반격을 가했다”고 당시를 분석했다.(펑더화이, 429쪽)
북한주재 소련대사 라자예프는 “전투에 이기고도 적을 추격하지 않는 작전을 지시하는 사령관은 누구냐?”고 항의하다 스탈린에 의해 조기 귀국당했다.(훙쉐즈, 203쪽).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압록강 단교’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단교 왼편으로 북중 교역의 주요 통로인 ‘중조우의교’로 불리는 압록강 철교가 보인다. 철로와 도로로 쓰인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중소의 ‘제한전’
미국에서도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 확전론과 트루먼의 제한전론 간에 갈등이 있었지만 중소도 확전을 피하고자 했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하자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공포로부터 해방됐다’고 반겼다고 한다. 전쟁이 한반도에 국한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에 따라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고 지원했던 소련과 중국은 미군이 신속히 지상군을 보내 참전하자 직접적인 대결이나 확전을 막으려고 했다.
중공은 공중전을 확대시키지 않아 미국의 핵공격 또는 중국 본토에 대한 보복행위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트루먼이 중국 본토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은 데는 중국이 공군력 행사에 신중한 것도 한 요인이라는 분석이다.(쑤이, 260쪽) 소련도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기 위해 공군 작전에서 제한을 두었다. 전쟁에 참가했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이유는 다르지만 미국도 소련 공군의 참전 사실을 비밀로 했다. 소련 참전한 것이 부각되면 여론을 자극해 전쟁이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선즈화, 504쪽).
소련 공군 참전 및 교전 수칙
- 소련 영토에서 이륙해 작전 투입 금지
- 중국 혹은 조선비행기로 위장, 조종사는 중국 군복 착용
- 조선 작전 투입 사실 누설 금지 각서와 선서
- 비행 중 러시아어 사용금지
- 유엔군 통제구역 혹은 전선 인접지역 비행 금지
- 서해 상공 교전 금지
- 평양〜원산 남쪽(39도선) 적기 추격 금지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