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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혹한과 인해전술 이긴 장진호 철수작전(上)(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덕동통로, ‘폭스 힐 중대의 기적’

유담리에서 27일부터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은 미 제1 해병사단 5연대와 7연대가 철수할 때 퇴로는 덕동통로 한 곳 뿐이었다. 이곳 돌파 임무를 맡은 7연대 F중대(폭스힐 중대)는 5일간 덕동통로에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중공군 3개 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며 지켰다. 폭스 중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했을 때 중대원 247명 중 생존자는 60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중증 동상에 걸려있었다. 바버 대위는 1952년 8월 대령에서 소령으로 진급한 뒤 트루만대통령으로부터 미군 최고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백악관에서 직접 수여받았다.

유담리의 주력 부대가 사단본부가 있는 하갈우리의 부대와 합류할 수 있는 지는 사단의 존망과도 직결된 것이었고, 이는 덕동통로라는 혈로를 지키느냐에 달려 있었다.(러스, 320쪽) 이런 상황에서 나온 ‘폭스힐 중대의 기적’같은 전과는 ①혹한 속에서도 진지 배치 직후 참호를 구축하는 기본 수칙을 지킨 점 ②하갈우리 포병 부대의 지원 사격 ③덕동통로를 우회해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작전 주효 ④C-47 수송기를 통한 탄약 등 공중 투하 ⑤무엇보다 고립된 부대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따른 부대원의 사기 등이 요인으로 꼽힌다.

미 해병대는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 등에서 밤에는 피리, 꽹과리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몰려드는 유령같은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갈우리를 포위해 밀집 포위한 중공군의 숫자가 많아 ‘들판 전체가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러스, 296쪽)
후퇴하는 부대가 모두 하갈우리에서 흥남 방면으로 18km 가량 떨어진 고토리에 집결한 것이 12월 7일 밤이었다. 병력 1만 명과 차량 1천 대 이상이 18km를 이동하는데 40시간이 걸렸다.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황초령의 수문교를 미군들이 복구하고 있다. 큰 사진 중간 협곡에 파괴된 부분이 보인다. 출처 영문 위키

황초령 수문교, 공중투하로 복구 후 계곡 통과

이튿날인 8일 황초령을 넘는 첫 관문은 450m 깊이의 계곡을 연결하는 수문교 중 중공군이 폭파한 약 7m 구간을 복구해 건너는 것이었다. 다리를 복구하지 못하면 차량과 전차 야포 등 장비를 버려야했다. 7일부터 극동 공군 전투공수사령부가 C-119 수송기 8대를 이용해 낙하산으로 임시 교량 경간목을 공중 투하했다. 1t이 넘는 경간목 4개 중 두 개는 중공군이 있는 곳으로 떨어지고 중공군의 간헐적인 공격이 계속되는 등 우여곡절 속에 9일 오후 사단 공병대대가 수문교 복구를 마쳤다. 대규모 교량 설비를 공중 투하해 계곡의 다리를 복구하기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꼽힌다. 야간을 이용해 병력과 장비 뿐 아니라 다수의 피난민도 다리를 건너 11일 흥남에 도착했다. 유담리에서 11월 27일 중공군 공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한 뒤 128km를 사방에서 포위 공격하는 중공군과 사투를 벌인 뒤 약 2주 만이다. 미군은 후위 부대가 모두 수문교를 건넌 것을 확인한 뒤 다시 폭파해 중공군의 추격을 막았다.

중국이 제작한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장진호 수문교’(2022)의 포스터.

한 장교는 북진 명령을 받고 장진호 부근으로 전진해 가던 상황에 대해 “중공군은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그런 적의 진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지칠 대로 지쳤다. 도쿄 본부에서 오는 명령은 하나같이 말도 안됐다. 우리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핼버스탬, 666쪽)


살인적인 추위, ‘세계 2대 동계 전투’

‘땅이 35cm까지 얼어 참호를 팔 수 없어 전투가 심할 때는 동료의 언 시신을 쌓아 방벽으로 이용하는 일까지 있었다.’(‘1129일간의 전쟁’, 261쪽). 당시의 참혹한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북한군이나 중공군보다 더 위협적인 건 한반도의 험한 산악과 악천후였다. 살을 에는 겨울 날씨가 미군에게는 최대의 적이었다.”(핼버스탬, 12쪽). 장진호 전투는 2차 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맞먹는 세계 2대 동계전투로 불린다.

전투 당시의 기온은 영하 37도까지 내려갈 때도 있었다. 습도가 높고 강풍이 불어 체감 온도는 더욱 떨어졌다. 양측이 인명피해를 집계할 때 사망, 실종과 함께 ‘동사자’를 분류해 파악했다. 양측 모두 자다가 동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전투 중 죽은 척하고 있으면 생사 확인도 않고 옷을 벗겨가 얼어죽었다.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미 해병대원들이 행군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눈을 녹여 식수로 쓰고, 총기나 대포의 철판에 맨손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깡통으로 지급되는 전투 식량이 얼어 옥수수나 콩을 떼어 입에 넣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 군의관은 “수혈용 혈액과 진통제의 모르핀도 얼어, 위생병은 모르핀이 얼지 않도록 입 속에 넣고 부상자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고, 혈액은 얼어 수혈을 하지 못해 많은 전우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고통을 봐야 했다”고 증언했다. 히긴스는 “동상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곳에서 동상은 많은 해병의 손가락, 발가락, 발, 다리가 절단되는 것을 의미했다”고 했다.(히긴스, 251쪽)

자동화기들은 정상보다 매우 느리게 작동했고 수류탄은 잘 터지지도 않았다. 박격포탄이나 야포 포탄에 부착하는 장약의 추진력이 약해져 포탄의 비거리가 짧아져서 아군 병력을 위협하기도 했다. 연료가 얼어 고체 덩어리가 되고 폭약을 터뜨려 구멍을 뚫은 뒤에야 참호를 파기도 했다.(러스, 294쪽)

중공군 장교도 “영하 20도는 보통이고 3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 계속됐는데 일부는 솜옷이나 털모자를 걸쳤으나 대부분 방한장비도 갖추지 못했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이 속출해 전투력 손실이 엄청났다”고 털어놨다.(훙쉐즈, 173쪽).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