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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지평리에서 현리까지 물망(勿忘)의 전투들(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14회]


중공군이 보름달 뜨는 날까지 계산해 1950년의 마지막 날 3차 대공세(1950년 12월 31일〜1951년 1월 10일)에 나선 이후 4일만인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점령했다. 1월 중순에는 평택〜원주〜삼척을 잇는 37도 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미군은 금강 방어선까지 밀리면 다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거나 한반도에서 철수할 구상까지 했다.

하지만 38선을 넘어온 후 중공군은 약점이 부각되는 반면 유엔군은 장점이 커졌다. 중공군이 북한 산악지대에서 수적 우세를 앞세워 유인 매복하던 수법은 한계가 있었다. 아군은 이제 포위돼도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고립 방어’로 버티며 막강한 화력으로 제압했다. 아군은 중공군 개입 이후 38선 이북에서 잇따라 패배한 뒤 위축된 자신감을 되찾고 공세로 돌아섰다. 불의의 사고로 워커 장군이 사망한 뒤 후임으로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을 앞세운 반격이 주효했다.


<북진과 후퇴 소요 기간 >
유엔군
중공군
· 38선 → 평양 : 19일
· 38선 → 압록강 : 26일
· 압록강 → 38선 : 67일
· 38선 → 서울 : 9일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3차 전역(공세)’ 지도. 서울 방면으로 주공을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월 8일 수원 원주까지 진격한 것으로 표시됐다. 단둥=홍진환 기자

‘서울 후퇴’ 공성전(空城戰)과 원주 전투

1951년 ‘1·4 후퇴’는 다시 수도를 뺏기는 것이었지만 워커 사망 후 부임한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의 공성전략이기도 했다. 중공군은 12월 26일 38선을 돌파한 뒤 주공(主攻) 방향을 서울로 두고 철원 연천 쪽에서 4개군을 앞세워 압박해왔다. 리지웨이는 서울이 포격권에 들어 많은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으면서 보다 방어가 유리한 곳에서 반격을 하기 위해 서울 남쪽 60km 지점의 오산〜삼척선까지 작전상 후퇴를 했다.

처음 한강 다리를 먼저 끊어 많은 납북자 피해를 낳았던 것과 달리 서울 시민에게는 1950년 12월 하순 피난령이 내려졌다. 후에 북한도 유엔군의 반격으로 밀려 올라갈 때 서울 사수나 방어 의지를 보이지 않고 3월 5일 군대를 철수시켰다. 서울은 공격과 방어 양측 모두 점령하고 있는 것이 이점도 되지만 부담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서울을 거쳐 남진하는 동안 중동부 전선의 원주가 중공군과 북한군에 의해 한때 점령당했다. 미 10군단 2사단이 원주를 탈환하고 지킨 ‘원주 전투(1월 5~13일)’ 승리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공산군이 37도선 이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남도현, 283쪽). 군우리 전투에서 한 개 연대 규모가 섬멸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미 2사단으로서는 38선 남쪽에서 설욕하는 전투의 서막이었다. 2월 지평리와 5월 벙커 고지, 9월 단장의 능선전투 등에서 미 2사단은 연승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원주전투 이후 피아간 접전은 37도선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경기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지구 전투전적비. 중공군에게 포위당한 채 혈투를 벌였던 전투 현장의 한가운데에 전적비와 미군과 프랑스군 충혼비가 세워졌다. 양평=구자룡 기자

지평리 전투, 전략 전술 리더십의 승리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1월 8일 ‘남진 잠정 중단’ 명령을 내리고 원주 전투에서 제동이 걸린 이후 주춤했던 중공군이 2월 중순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제39군 예하 3~5개 사단으로 공격해 왔다.

2개 군단이 만나는 이른바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인 이곳에는 미 2사단의 23연대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병력에서 10배가 넘는 중과부적의 상황. 23연대는 둘레 약 12km의 원형으로 진을 치고 부대 간 빈틈을 없애 방어에 나섰다가 중공군이 점차 포위망을 좁혀오자 방어망 둘레를 6km로 축소했다. 이곳은 사단 본진과 30km가량 떨어져 즉각적인 지원도 어려웠다.

경기 양평군 지평리 전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중공군의 나팔. 양평=구자룡 기자

지평리 전투에 참가한 프랑스 대대는 수동식 사이렌으로 중공군의 나팔 소리에 맞불을 놓아 혼란에 빠뜨린 뒤 돌격해 백병전을 펼쳤다. 지평리 전투기념관에 게시된 수동식 나팔을 돌리는 상황도. 양평 = 구자룡 기자

지평리 전투에서 프랑스 대대가 사용했던 수동식 사이렌


전투 70여년이 지난 뒤 찾아간 지평리는 주변이 얕은 산으로 둘러싸여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전쟁 당시에는 원형으로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촘촘히 방어망을 구축한 채 밤만 되면 물밀듯이 파고드는 중공군과 때로는 백병전까지 벌였던 곳이다. 방어진지 중심부쯤에 세워진 기념관에는 중공군이 불었던 나팔 실물과 프랑스 대대가 사용한 수동 사이렌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야간에 벌인 소음 전쟁이 생각나게 했다.

경기 양평군 지평리전투 기념관은 지평리가 을미의병의 발원지이기도 해서 의병과 전투 기념관이 함께 조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평=구자룡 기자

1951년 2월 13일 어둠이 짙게 깔리자 사방에서 횃불을 들고 징과 꽹과리를 치는 중공군이 밀려들었다. 원형진지 안으로 포탄도 쏟아부어 연대 참모가 전사하고 연대장 폴 프리먼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진지를 지켰다. 이튿날 날이 밝자 미 공군의 공중 폭격으로 공세는 주춤했으나 다시 밤이 되자 사전 정찰에서 철조망이 없었던 남쪽으로 중공군이 돌파를 시도해 산발적으로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틀 밤이 지난 뒤 원형 방어 진지 밖에 대한 미 공군의 맹폭 지원 속에 미 제5 기병 연대가 포위망을 뚫었다. 일본에서 발진한 C-119S 수송기 24대는 14일 3시간가량 보급품을 공중 투하했다. 2박 3일간의 전투에서 중공군은 5400여명이 전사한 반면 23연대는 전사 52명, 실종 42명이었다.

지평리 전투가 끝난 뒤 우그러진 철모와 옷가지 등이 널려 있다. 지평리 전투기념관 전시. 양평=구자룡 기자


‘인해전술’ 극복한 반격의 전환점

랄프 몽클라르 중장. 대대 병력을 지휘하기 위해 스스로 중령으로 계급을 낮춰 참전했다.

지평리 전투에는 프랑스가 파병한 1개 대대가 참가했다. 대대장은 1차 대전에도 참전했다 전역한 랄프 몽클라르 중장(이는 레지스탕스 활동 당시 가명이고, 본명은 마그랭 베르느네)이다. 대대급 병력 파견으로 대대장을 맡기 위해 스스로 중령으로 계급을 낮췄다. 프랑스 대대는 중공군의 심리전 무기였던 나팔 소리에 대응해 휴대용 수동식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중공군 나팔 소리를 삼켜버렸다. 병력 운용의 신호로도 사용했던 나팔 소리가 사이렌 소리 때문에 안 들리자 중공군이 우왕좌왕했다. 이때 프랑스 대대 병사들이 화력을 집중해 공격하고 진지를 박차고 나가 육박전을 벌여 성과를 거뒀다. 프랑스 대대에는 카투사 한국인 병사 101명도 포함됐다. (‘1129일간의 전쟁’, 312쪽)

지평리 전투기념관 전시된 105mm 포탄 탄피와 권총, 칼 등 무기와 장비. 양평=구자룡 기자

중공군 부사령관 훙쉐즈는 지평리 전투에 대해 “제공권이 없어 고전했다. 미군 전투기가 벌떼처럼 달려들어 맹폭을 가하니 밤에만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지원 병력도 물밀듯이 몰려왔다. 미군은 이 전투 후 전술상 하나의 지점을 고수하면서 인근 부대의 지원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작전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훙쉐즈, 236쪽)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다시 반격의 터닝포인트를 이루게 하는 분기점이자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주눅 들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전투였다. 중공군이 수적 우세를 앞세워 매복과 기습, 포위 전술로 북부 산악지대에서 유엔군을 몰아내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확인한 전투였다. 비록 적에게 포위돼도 방어 전면을 좁혀 방어하면서 진지 밖 적에 대해 화력을 퍼부은 것이다.

경기 양평군 지평리 전투 기념관을 찾은 방문객들이 남긴 메시지. ‘전쟁은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는 문구가 보인다. 양평=구자룡 기자

지평리 전투가 끝난 뒤 훈장을 받기 위해 서 있는 프랑스대대 부대원들. 지평리 전투기념관 전시. 양평=구자룡 기자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