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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지평리에서 현리까지 물망(勿忘)의 전투들(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사창리 전투, 국군의 공중증(恐中症)과 가평의 영연방 여단

지평리 전투의 타격으로 움츠렸던 중공군이 2개월여간 재정비 끝에 무려 70여만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5차 대공세를 벌였다.

국군 6사단(사단장 장도영)이 강원도 화천의 화악산과 사창리 일대에서 중공군 4개 사단에 포위된 상황은 지평리의 미 2사단 23연대와 비슷했으나 결과는 천지 차이였다.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분산되어 있는 예하 연대가 서로 연결되지 못해 틈을 파고든 중공군에게 분리 포위되어 공격을 받았다. 꽹과리 피리 나팔 소리에 ‘초산의 악몽’이 다시 살아났다. ‘고립 방어’를 통해 화력 지원을 받기보다 포위당하는 두려움에 무질서한 후퇴와 도주에 나섰다. 화력 지원에 나섰던 미 포병대대도 포위 타격을 당했다. 사창리 전투(4월 22〜24일) 사흘간 6사단 1만3천여명 병력 중 가평으로 철수해서 남은 병력은 6300여명에 불과했다. 6·25 전쟁 기간 국군에 줄곧 나타났던 ‘공중증(恐中症·중공군을 두려워하는 심리)’이 그대로 드러났다.

경기도 가평읍에 1967년 세워진 영연방 참전 기념비.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4개국의 국기가 태극기, 유엔기와 함께 게양되어 있다. 가평=구자룡 기자
 
사창리에서 장비도 내팽개치고 도망친 국군 6사단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긴급히 투입된 부대가 영연방 제27여단이었다. 27여단은 영국 미들섹스연대 1대대, 호주 왕립연대 3대대, 캐나다 프린세스 페트리샤 경보병 2대대, 뉴질랜드 왕립 제16 포병연대 등 4개국 연합부대였다. 국군 6사단 패잔병들이 무질서하게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북으로 향하던 영연방 여단은 23일 가평에서 중공군 제20군과 만났다.

영연방 여단은 3일 동안의 가평 전투(4월 23〜25일)에서 부대원의 40% 이상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켰다. 이를 통해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확보하고 수도권 방어를 위한 시간을 벌어줬다. 가평 전투는 수적으로 크게 밀리는 상황에서 ‘버티기 승리’를 통해 중공군의 5차 대공세라는 또 하나의 고비를 넘는 데 기여했다.

가평지구 전투기념비. 출처 국가보훈부

경기도 가평의 영연방 참전비 옆에 영국 미들섹스 연대 장병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가평=구자룡 기자


‘고립 방어’의 성공 사례 설마리 전투
 
경기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감악산 일대에서 영국군 제29여단을 중공군 제63군 3개 사단이 포위했다. 지평리나 가평 전투와 마찬가지로 ‘고립 방어’ 의지만 있으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았다. 방어선을 최대한 줄이고 밤을 버틴 뒤 낮에는 막강한 화력 지원으로 방어선 외곽의 중공군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온창일 등, 210쪽)

경기 파주군 적성면의 설마리 전투 기념공원에 영국 글로스터 대대원들 동상이 세워져 있다. 파주=구자룡 기자

영국 제29여단은 병력에 비해 넓은 정면을 담당한 데다 각 대대 및 중대가 서로 떨어져 상호 지원할 수 없는 약점을 가진 상황에서 1951년 4월 22일 밤 중공군 제63군 3개 사단이 일제히 임진강을 건너와 공격했다. 글로스터 대대원 652명의 10배도 넘는 규모였다. 235 고지로 철수한 좌측 담당의 글로스터 대대는 후방으로 침투한 중공군에 포위 고립됐다. 이 전투에서 탈출한 영국군은 67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59명 전사, 장교 21명을 포함한 526명은 포로가 됐다. 사흘간 피로 버틴 설마리 전투는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다.

강원도 인제의 오미재 고개 정상에 해발 500m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주변이 모두 깊은 산속이어서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인 것을 느끼게 한다. 인제=구자룡 기자

국군과 미군의 관할권 다툼으로 생긴 구멍, 오마치(오미재) 고개

1951년 5월 태백산맥 서쪽 산악지대는 6·25 전쟁이 터진 후 새로 창설된 9사단과 11사단을 중심으로 한 국군 제3군단이 맡았다. 미군 주축의 유엔군이 주로 담당한 서부전선에 비해 열세였다. 조중(朝中) 연합군사령관 펑더화이는 막강한 화력의 미군이 주력인 서부보다 이곳이 약한 곳으로 보고 돌파하기로 했다. 당시 중동부 전선의 국군은 6개 사단인 반면 중공군은 18개 사단을 투입했다.

현리 전투의 참패는 이런 수적 열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발단은 국군과 미군 간 관할권 공백과 다툼이었다. 자연 지형에 대한 고려 없이 관할지역을 구분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제군 31번 국도의 오마치고개는 미 10군단 관할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마치 고개의 위아래 보급로는 국군 3군단에 속했다. 상체와 하체는 국군이 맡고 허리는 미군에 속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주요 지형지물은 분할하지 않는다’는 전술 교리에 맞지 않았다. 더욱이 이곳은 ‘차단되면 끝이다’고 생각될 만큼 요충지였다.

3군단은 미군 관할 지역에 29연대를 배치했다. 이게 화근이 됐다. 미10군단이 왜 남의 관할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느냐며 철수하라고 했다. 결국 29연대를 빼면서 1개 대대만 남겨놓았는데 이번에는 더 상위인 미 8군에서 철수를 요구했다. 4월 11일 오마치에서 대대 병력마저 철수시켰다. 문제는 국군이 병력을 모두 빼낸 뒤 미군이 즉각 배치되지 않은 것이다. 인제 홍천 횡성 정선을 이어주는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를 비워둔 것이다.

강원도 인제 오미재 고개에 세워진 현리지구전투 전적비. 인제=구자룡 기자

방어, 초기 대응, 후퇴 총체적 실패

중공군 선발대 1개 중대가 17일 오전 7시30분경 오마치 고개를 장악했다. 그들은 30km가량 떨어진 곳에서 출발해 야간 12시간 동안 산악지대를 시간당 평균 2.5km씩 행군했다. 선발대 도착에 이어 곧 제60사단 전체가 밀물처럼 쏟아져 올라왔다.

오마치 고개가 적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차단돼 포위당할 것을 우려한 3사단의 김종오 사단장이 진지 사수를 포기하고 철수를 명령한 것이 대 실책이었다. 미군이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위당하는 것이 곧 전멸은 아니었다. 지평리 전투나 바로 옆 벙커고지 전투가 이를 증명했다.

그런데 3사단은 철수를 위해 현리에 집결한 뒤 적이 장악하고 있는 오마치 고개 돌파를 시도했다. 고개를 점령하고 있는 부대 규모를 오판했을 수도 있다.

고개를 장악한 중공군의 공격을 받자 부대원들은 무거운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까지 버리고 무질서하게 주위 방대산 등을 타고 도주했다. 일부 간부는 계급장도 떼고 철수했다고 한다. 퇴로가 차단됐다는 이유만으로 전투를 포기하고 사단장부터 말단 사병까지 줄행랑을 쳤다. 70km가량 남으로 내려왔을 때 3사단은 34%, 9사단은 40%가량만이 수습됐다.(남도현 324쪽)

강원도 인제의 현리전투 위령비. 3군단은 ‘전투에서 희생된 선배 장병들의 시신을 화장했던 곳에 위령비를 세운다’며 ‘부끄러웠던 현리전투를 숨기려 하기보다 와신상담의 계기로 삼겠다’는 다짐을 담은 위령비 건립 취지문을 새겨놓았다. 인제=구자룡 기자

유재흥 당시 3군단장은 “솔직히 하룻밤 사이에 아군 전선을 뚫고 산악지대를 30km나 주파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관할권이 겹쳐 오마치에서 부대를 철수하더라도 고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소규모라도 부대를 배치하지 않은 것이 천려일실이었다고 했다. 부대가 후퇴하면서 전혀 보조를 맞추지 못해 미 10군단과의 사이에 30km에 달하는 틈이 발생했다. 적은 무인지경인 상태에서 침투할 수 있었다. 현리전투 인근 희생된 많은 장병을 화장한 곳에 ‘위령비’가 세워졌다. (유재흥, 270쪽)

현리전투(5월 16〜22일) 패배로 3군단은 해체되고 유재흥 군단장은 보직을 잃었다. 그는 개전 초기 가장 먼저 붕괴된 전방의 7사단장으로 7사단이 해체됐다. 이어 1·4 후퇴 후 그가 군단장이던 2군단도 대전에서 해체된 바 있다.

경기 양평군의 ‘용문산지구 전적비’. 누워있는 동상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굳건히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와 영령들의 안식처임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양평=구자룡 기자

벙커고지와 용문산의 설욕

군우리 전투 참패 후 지평리 전투에서 되갚았던 미 2사단은 중공군의 6차 대공세(5월 16일~20일)에서도 선전했다. 벙커고지 전투(5월 17∼19일)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고지를 사수해 중공군의 홍천 진격을 막았다. 지평리 전투의 주역이 23연대였다면 벙커고지 전투는 38연대였다. 국군 3군단이 현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있던 때 38연대도 홍천 북방 778고지 일대에서 포위됐다. 38연대는 적과 근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전 병력이 참호를 깊이 파고 벙커에 엄폐한 뒤 피아가 섞인 진지 내에 포화를 퍼붓도록 하는 위험한 작전을 벌이면서까지 진지를 지켰다.

용문산 전투(5월 18~20일)도 현리, 벙커고지 전투와 같은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전투 중 하나였다. 국군이 사창리와 현리 전투에서 잇따라 패퇴해 국군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에서 이를 만회한 쾌거였다. 당시 사단장은 사창리 패전 때와 같은 28세 약관의 장도영 소장으로 그의 설욕전이기도 했다. 6사단 2연대 장병들은 철모에 ‘결사(決死)’를 새기고 전투에 임했다.

파로호 전적비

용문산 일대에서 쫓긴 중공군은 화천호까지 밀려가 배수의 진을 치고 저항하다 저수지에 뛰어들거나 아군의 포화에 목숨을 잃었다. 사살된 적군이 1만7100여명, 살아서 돌아간 병사는 1000여명에 불과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호에 오랑캐를 섬멸한 곳이란 뜻으로 파로호(破虜湖)라는 전적비를 세웠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