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영천이 무너지면, 인천상륙도 없다” 철수만 3차례 고민한 미군(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맥아더 ‘대중(對中) 강공’ 제안

맥아더는 ‘강압에 의한 철군 결정’이라는 워싱턴의 패퇴 전략에 대해 ‘4개항 대중 강경 방안’으로 응수했다. 맥아더는 △중국 해안 봉쇄 △중국 내륙 공업시설을 해공군 폭격으로 파괴해 전쟁 수행 능력 해체 △대만 국민당 군대의 유엔군 지원 △대만군에게 중국 본토 견제공격 허용 등이다. 맥아더는 전략적 차원에서 유럽 안보에 우선을 두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시아에서 패배하면 결국 유럽의 패배로 이어질 것이라며 극동에 대한 우선적 지원을 강조했다.

합참은 도쿄에서 맥아더와 만나 ‘인력과 물자의 심대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 일본으로 철수하라’는 지침을 재확인했다. 합참은 중국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조치로 인해 일본이나 서유럽이 대규모 적대행위에 말려드는 것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결코 이롭지 못하다는 트루먼의 경고도 전달했다. 다만 유엔군이 한국으로부터 철수하는 것은 군사적 필요에 의해 불가피한 것이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최악의 경우 한국의 망명정부를 제주도 등으로 옮기기로 했다.(김철수, 211쪽) 

워싱턴의 수세적인 방침과 달리 맥아더는 중국 폭격 등 확전론을 폈다. 워싱턴이 소련까지 개입할 수 있다며 우려를 제기한 것에 대해서는 “소련이 세계 전쟁도 불사할지는 동서 양 진영의 전투력과 능력을 소련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있다”라며 “감히 그런 경솔한 짓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맥아더, 240쪽) 소련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해도 군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소련의 보급로는 시베리아 철도 하나뿐인데 공중에서 얼마든지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맥아더, “소련 참전하면 미 8군 일본으로 철수”

12월 23일 교통사고로 워커 8군 사령관이 사망했다. 맥아더가 26일 워커 후임으로 부임한 리지웨이를 도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리지웨이는 소련군이 참전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맥아더는 “그런 일이 발생하면 몇 개월이 걸려서라도 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킬 것”이라고 대답했다. 소련 참전 가능성은 낮게 보지만 소련이 참전하면 3차 대전으로의 확전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지웨이는 자신이 부임했을 때 ‘철수’가 현안이어서 이승만 대통령과 처음 만났을 때도 해명해야 했다. 그는 “고령의 전사에게 내가 미 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기 위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 가장 첫 번째 과제였다”고 했다. 그래서 이승만을 만나 건넨 인사말이  “여기에 머물기 위해 왔습니다”였다고 소개했다.(리지웨이, 141쪽)>

리지웨이는 부임 후 중공군 기세에 눌리지 않고 ‘위력 수색’을 벌이며 반격 작전을 폈다. 당시에 널리 퍼진 한반도에서의 철수까지 고려하는 패배적인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것이었다.

1·4 후퇴 피란민 행렬. 개전 직후와는 달리 사전에 피란을 예고해 서울에서 납북 피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12월 초에 이미 철수 피난 준비” 

프란체스카 여사의 12월 일기에도 철수에 대한 우려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오후에 챔프니 대령이 극비명령서를 받았다며 대통령 뵙기를 원했다. 미 8군사령부로부터 교사, 기술자, 의사 등 저명한 민간인과 가족의 명단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8군은 이미 8천5백 명의 가족을 선박으로 제주도에 피난시킬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12월 13일)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군과 국무부가 한국 철수에 대해 약간 견해를 달리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전황이 나빠지면 일본으로 미군을 빼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군 수뇌들은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미군이 한국으로부터 명예롭게 철수하는 길을 고려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 국무부는 ‘강제로 물러나지 않는 한’ 한국으로부터 후퇴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트루먼, 408쪽). 군이나 국무부 모두 한반도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는 점에는 차이가 없었다.


“금강 넘으면 100만 명 철수”

많은 6·25 전쟁 연구자들이 전쟁 중 한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 즉 미군이 철수해 전쟁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때로 보는 것은 1·4 후퇴 이후다. 더 정확히는 1월 중순 중공군이 북위 37도선, 평택∼원주∼삼척까지 내려왔을 즈음이다. 

미 정부의 1월 12일 ‘유엔군의 전쟁지도 지침’에는 ‘100만 명 제주도 철수 이동 계획’이 포함됐다. 유엔군은 일본으로 철수하고 한국 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장면 주미대사가 유엔군 철수 검토를 항의하자, 러스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미국은 군사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경우가 아닌 한 철군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악의 경우 한국 망명정부 수립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알고 싶다”고 했다. 

미국 정부가 극비리에 추진한 이 계획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법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국의 정부 관리 이외에도 군과 경찰을 제주도로 이전한다”고 되어 있다. 대략적인 인원은 행정부 관리와 그 가족 3만 6천명, 한국 육군 26만 명, 경찰 6만 명, 공무원, 군인 및 경찰 가족 40만 명 등 100만 명 가량이다.(김철수, 212쪽)

제주도가 용이하지 않으면 한국군을 일본으로 후송시키는 것은 한일 간 민족 문제로 비화될 수 있어 일본 본토가 아닌 오키나와 기지에 주둔시키는 방안을 검토했다. 무초 대사도 제주도 지역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줄 것을 요청했다.(이상호, 321쪽)

이 계획은 한국군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극비로 하되 유엔군 방어선이 금강선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구체화하지 않기로 했다. 당시 전선에서 금강까지는 50km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공군은 펑더화이(彭德懷)가 1월 8일 남진 전면 중단을 선언한 뒤 속도 조절을 했다.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을 앞세운 반격도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극복해 가고 있었다. 다행히 전선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아 철수 계획도 이행되지 않았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