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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군번 계급없는 영웅! 학도의용병(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16회]

경북 영덕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 있는 ‘선박 전승기념관’ 문산호. 영덕 = 구자룡 기자

포항에서 7번 국도를 따라 20여km를 올라가면 영덕군 남정면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 커다란 배 한 척이 정박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대형 태극기가 갑판에 걸려있고 배의 옆면에 ‘작전명 174호…잊혀진 영웅들!’이란 커다란 구호와 함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 흰색으로 쓰여있다. 인천상륙작전 전날 양동작전을 위해 장사상륙작전에 동원됐다 좌초했던 ‘LST 문산호’다. 1997년 3월 6일 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 1사단 대원들이 바닷속 갯벌에서 발견했다.

경북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의 학생 모자 조형물. 영덕 = 구자룡 기자

문산호에 오르기 전 해변에 조성된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에는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비’, 상륙작전 하는 병사들 조형물 등이 있다. 공원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고등학생 모자 조형물. 모자 앞에 ‘高’자가 선명하다. 상륙작전에 참여한 부대원 대부분이 학생들이었음을 상징한다.

경북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에 조성된 상륙작전을 펴는 학도의용병 동상. 뒤로 문산호가 보인다. 영덕 = 구자룡 기자

학도병으로 구성된 ‘독립 제1 유격 대대’, ‘명부대’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27일 대구와 밀양에서 모집한 772명으로 육군본부 직할의 ‘독립 제1 유격 대대’가 편성됐는데 대부분 학생들이었다. ‘독립 제1 유격 대대’는 이명흠 대위가 직접 대구역 광장 등에서 모병해 ‘명부대’란 별명이 생겼다. 명부대에 내려진 ‘174호 작전’ 명령은 ‘장사해안에 상륙해 김무정 중장 휘하 북한군 제2군단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아울러 적의 후방을 교란하라’는 것이었다.

경북 영덕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 있는 전승기념관 문산호의 입구. 영덕 = 구자룡 기자

문산호 기념관 내부에는 학도병으로 참가하게 된 다양한 증언들이 소개됐다. 나라 없는 학교가 무슨 소용인가, 의무감과 사명감으로 왔다. 자원입대하려고 모병소에 갔더니 나이가 어려 학교장 추천서를 받아오라고 해서 추천서를 받아서 왔다 등 자원입대 진술이 있다. 반면 밀양교를 건너 부산으로 가고 있는데 군인이 오라 하더니 다른 군인에게 인계했다. ‘아저씨 저 17살이에요’ 했지만 ‘잔소리 말고 따라와’ 해서 교복을 입은 채로 미군 트럭에 실려 창녕군의 낙동강으로 갔다는 사연도 있다. 당시 모병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주어 긴박함과 함께 안타까움이 더했다.

장사전승기념관에 전시된 장사 해변에 좌초되어 있는 상륙정 문산호의 실제 사진.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학도병은 밧줄을 이용해 상륙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어 많은 희생이 따랐다. 장사전승기념관에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다. 영덕 = 구자룡 기자

태풍 좌초에도 ‘밧줄’ 상륙과 작전 수행

‘174호 작전’은 적을 속이기 위해 대대급임에도 불구하고 ‘사단’으로 위장했다. 중대를 연대로 부르고, 지휘관들도 그에 맞는 임시 계급을 부여했다. 북한 방송이 ‘2개 연대가 상륙했다’고 한 것은 이런 기만책이 효과를 본 것이었다. 부대는 출항하기 전 명부대원과 미군이 번갈아가며 승선과 하선을 수차례 반복해 마치 미군도 상륙작전에 참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나무위키’)

‘명부대’ 대원 772명을 실은 문산호가 하루 전 부산항을 출발한 뒤 9월 15일 오후 2시경 장사해안에 도착했을 때 한반도로 접근하던 태풍 케지아는 동해로 올라오고 있었다. 태풍으로 출항 및 해안 도착이 계획보다 하루 늦어졌다. 서해에서 인천상륙을 준비하던 맥아더는 태풍이 동해로 비껴가 한숨을 돌렸으나 명작전 주함이었던 2700t급 문산호는 좌초됐다.

태풍으로 상륙지점을 찾지 못해 표류하던 문산호가 상륙지점 해안에서 300m 떨어진 해역에서 좌초되자 특공대는 문산호와 해안에 밧줄을 연결해 상륙을 시도했다. ‘밧줄 상륙’ 과정에서 학도병들은 적의 총격에 일개 중대가 거의 몰살됐다고 한다.(최상진, 60쪽) ‘72시간 임무 수행 후 전원 철수’라는 상륙작전은 문산호 좌초와 함께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장사전승기념관에는 경북 영덕에 상륙한 대원들이 외부와 연락이 단절된 채 고군분투하는 장면을 재연해 놓았다. 영덕 = 구자룡 기자

그럼에도 적의 포화 속에 물로 뛰어들어 상륙한 대원들은 해안의 200고지를 점령하고 5일간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전투를 벌이다 구조선 LST 조치원호로 귀환했다. 철수할 때도 해안에서 200m가량 떨어진 해상에 조치원호가 정박해 ‘밧줄 철수’를 했다. 양측이 전투를 벌이면서 긴박하게 철수하면서 39명의 대원은 미처 승선하지 못했다. 이들은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포항전투사’, 31쪽)

이명흠 대위를 포함해 ‘명작전’에 참가한 누구도 이 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연막작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초 사흘에서 1주일로 길어진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부산 부두에서 신문 호외를 보고 자신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에 동원됐음을 알게 됐다.(‘학도의용군 연구’, 163쪽)

장사상륙작전 일지
출처 :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 8월 27일 ‘독립 제1 유격 대대’ 편성(772명)
· 9월 12일 ‘작전 명령 174호’ 전달
· 9월 14일 LST 문산호 승선, 부산항 출발
· 9월 15일 장사 앞바다 도착, 태풍으로 좌초
· 9월 15일 ‘밧줄’ 상륙, 200고지 점령
· 9월 16〜8일 북한군과 교전. 적 2군단 후방 보급로 차단 작전
· 9월 19일 구조선 LST 조치원호로 ‘밧줄’ 귀환
· 아군 피해 : 139명 전사, 92명 부상, 39명 미승선 포로
· 북한군 피해 : 270명 사살

경북 포항 현 포항여고 앞의 ‘학도의용군 전적비’ 포항 = 구자룡 기자

‘옥쇄한 학도의용군’

현 포항여고 앞에는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가 있다. 전사자는 48명인데 전적비 뒷벽에 새겨진 전사자 이름은 14명이다. 전투가 끝난 뒤 보름가량이 지나서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게 돼 상당수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11일 학도의용군 71명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국군 3사단 지휘소로 사용되던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적에게 포위된 채 전투를 벌였다. 나이는 16〜21세로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피란 왔다 참가한 고등학생과 일부 대학생들이었다. 북한군 5사단과 766 유격부대는 이날 새벽 3시 반부터 4차례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해왔다. 학도병들은 M1 소총과 각자 250여발의 실탄, 수류탄이 가진 무기의 전부였으나 북한군은 장갑차까지 동원됐다. 실탄이 떨어진 뒤에는 육박전까지 벌이는 혈투로 11시간 반을 버티다 48명이 전사하고 13명은 포로가 됐다. 부상자 6명은 초반에 후송되고 4명은 행방불명이었다.

이들이 피로 버티며 적의 진격을 지연시켜 많은 시민들이 피난 갈 수 있었고 사단 지휘소의 주요 서류와 물자도 후방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1129일간의 전쟁 6·25’, 602〜7쪽)

이우근 학생의 편지. 포항 = 구자룡 기자

전적비 옆에는 이곳 전투에서 전사한 서울 동성중 3학년 이우근 학생이 ‘결전’ 하루 전날 메모지에 쓴 피 묻은 편지가 소개되어 있다. 편지는 시신을 수습할 때 주머니에서 발견됐다.

‘지금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엎드려 있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인데 적병은 너무 많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아니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는 다시 편지를 쓰지 못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