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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군번 계급없는 영웅! 학도의용병(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낙동강 방어선의 동쪽 끝인 형산강 강가에 최후의 방어선 ‘워커 라인’ 표지적이 세워져 있다. 포항 = 구자룡 기자

학도의용군의 활약을 기리는 기념탑은 여러 곳에 있지만 전승기념관은 포항이 유일하다. 포항 = 구자룡 기자

최후의 방어선(워커 라인)이자 학도병 성지, 포항

포항 형산강은 6·25 전쟁 최후의 방어선으로 ‘워커 라인’ 표지석까지 세워져 있다. 특히 학도병의 활동이 활발해 국내에는 유일하게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이 있다.

포항여고 앞의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를 출발해 포항시 충혼탑〜전몰학도 충혼탑〜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전몰학도 기계 안강지구 전투전적비〜기계 안강지구 전투격전지 조망대로 이어지는 ‘호국 문화의 길’은 학도병의 전투를 기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건물 앞의 학도병과 어머니 동상. 포항 = 구자룡 기자

전승기념관 앞 돌 비석에 새겨넣은 학도의용병 사진은 교과서에서도 봤던 널리 알려진 사진. 그런데 그 앞에 한 어머니가 두 손을 뻗어 마치 죽은 아들을 부르듯 안타깝게 무릎을 꿇고 있는 조각이 설치됐다. 병사나 학도병, 소년병 할 것 없이 생떼같이 귀한 자녀를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른 전쟁터에 보내는 안타까운 모정(母情)을 보여준다.

낙동강 방어선의 포항 형산강 전투 등을 기념하는 경북 포항의 포항지구전적비. 포항 = 구자룡 기자

개전 4일 만에 나선 학도병

‘학도병은 1950년 6월 29일 이후 ‘학도의용군(재일동포 학도의용군 포함)’으로 육·해·공군 또는 유엔군에 배속돼 1951년 2월 28일 해산할 때까지 근무한 자로서, 전투에 참가하고 그 증명이 있는 자를 말한다. 전상(戰傷)으로 중간에 나온 자도 포함한다.’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에 전시된 학도의용군 신분증.

학도병은 6월 29일 수원에서 자발적으로 조직한 ‘구국 비상학도대’가 시작이다. 6월 28일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상황에서도 결사적으로 한강을 도하해 수원에 모인 학생 2백여명이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를 발족했다. 그 후 다양한 학도병 조직이 나타났는데 정훈군은 신분증도 발급했다. 다른 학도병 단체의 모체가 된 수원 비상학도대는 한강 방어선의 노량진 전투에 투입돼 상당수가 희생됐다.

‘의용군’이라는 용어는 북한 인민군이 남침 후 양민을 동원하면서 사용해 용어의 혼란을 피해 ‘학도의용병’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학도병은 학생으로 군번을 부여받지 않은 사람만 해당된다. 군번이 있으면 정규군으로 신분이 바뀐다. 자발적으로 지원한 학생 중 군번을 받지 않았으면 복귀령 이후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군번을 받은 경우 현역으로 복무해야 했다.

경북 포항 형산강 도하작전의 호국 영웅 연제근 상사 특공결사대상.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의 한 축인 형산강에서 1950년 8월 11일부터 9월 22일까지의 형산강 전투에서 형산강을 지켜내는데 특공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포항 = 구자룡 기자

전남 순천시의 호남호국기념관. 호남지역에서는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1951년 1월 제18전투경찰대대가 전북 정읍의 칠보발전소를 지켜냈고, 호남지역 학도병들이 화개전투에 참여하는 등 호남의 호국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순천=구자룡 기자

전남 여수시의 6·25 참전 학도병 기념비. 여수=구자룡 기자

다양한 전투에 투입된 학도병

낙동강 방어선 전투 당시 다부동 기계·안강, 영천, 포항 등에 총 30여만명이 참가했다. 그중 5만여 명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고 그 외 인원은 후방 선무, 공작 활동 등을 맡았다. 7천여명이 군번도 계급도 없이 싸우다 전사했다. (‘1129일간의 전쟁 6·25’, 597쪽)

6·25 전쟁은 개전 초부터 많은 전사자가 발생해 병력 보충이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낙동강 방어선뿐 아니라 다양한 전투에서 소년병과 함께 긴급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된 국군 해병 1연대에도 제주도에서 급히 모집해 배에서 소총 작동법만 배우고 투입된 학도의용병이 포함됐다.

전남 여수 순천 광양 등 호남 동부지역 학생 180여명은 7월 초 혈서를 쓰고 학도병에 자원입대한 뒤 7월 25일 섬진강 화개전투에 참가했다. 이들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1천여명과 전투를 벌이다 7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이는 6·25 전쟁에서 학도병이 치른 첫 번째 전투라고 한다.(순천 ‘호남호국기념관’)

정부는 병력 충원이 원활히 이뤄지면서 1951년 3월 학도병은 학교로 돌아가도록 했다. 정부의 학교 복귀 지시나 대통령의 담화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곳에서는 학도병 활동이 중단되지 않고 휴전 때까지 계속된 곳도 있었다.(‘학도의용군 연구’, 73쪽)

관심 연구 지원 부족한 학도병

학도병의 활약과 희생을 주제로 한 영화가 ‘학도의용군’(1977), ‘포화속으로’(2010), ‘장사리, 잊힌 영웅들’(2019) 등 여러 편 나왔다. 학도병은 국군이나 미군에 배속되어 활동하거나, 적지에서 유격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공식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연구 평가 지원 등이 다른 참전 용사들에 비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대부분의 참전자들이 사망하거나 이제는 고령으로 직접적인 증언을 듣기도 어려워지고 있다.(‘학도병 연구’, 2쪽)

재일학도의용군들이 태극기에 참전 결의를 가득 적었다. 일본에선 태극기를 구할 수 없었던 탓에 6·25 당시 일본 동경에 거주하던 한인 학생들이 일장기에 파란 물감을 덧칠하고 4괘를 그려 만들었다.’


재일학도의용군

6·25 개전 직후부터 일본의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청년 및 학도 지원병을 전선에 파견하기로 했다. 재일 한인 청년들은 미군 극동사령부의 심사를 거쳐 동경 아사카 캠프에서 유엔군과 함께 2주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일본에 머물던 거류민단 소속 부녀회가 제작해 준 의용군 휘장을 미군 군복 상의나 군모에 달고 6·25 전쟁에 참전했다.

제1진 69명은 1950년 9월 11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발한 유엔군과 함께 배를 타고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에 3차례, 원산과 부산에 각각 한 차례씩 5차례에 걸쳐 653명이 참전했다.(‘1129일간의 전쟁’, 608쪽)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