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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맥아더는 왜 전쟁 중 해임됐나(3)[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대통령에 경례하지 않은 맥아더

맥아더가 자신이 탄 비행기를 연착시켜 대통령이 기다리게 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하와이를 거쳐온 트루먼의 전용기 인디펜던스호는 오는 도중 예정보다 빨리 도착하지 않기 위해 조종사가 일부러 비행속도를 늦추었다.(트루먼, 340쪽)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면서 경례를 하지 않은 것이 모두의 눈에 띄었다. 덜레스 국무부 고문이 회담 후 무례함을 들어 교체를 건의했지만 트루먼은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든 미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오지 않고는 해임할 수 없다”고 했다.

트루먼은 오전에 회담을 마치고 점심을 같이 하고 싶어했지만 맥아더가 도쿄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했다. 맥아더는 시차 때문에 점심을 하고 가면 한밤중에나 도쿄에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트루먼은 퇴임 수년 후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버넌 월터스로부터 웨이크섬에서 맥아더가 경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그를 해임했는데 실은 훨씬 전에 해야 했다.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다”고 털어놨다.

회담에 워싱턴에서는 35명의 기자와 카메라맨이 3대의 비행기에 나눠타고 와서 트루먼을 동행 취재했다. 반면 도쿄 사령부를 출입하는 ‘근위대’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기자들은 가지 못했다. 맥아더는 전용기에 여유가 있었지만 국방부가 허락하지 않아 기자단 동행없이 섬으로 왔다.

웨이크섬 회담은 메모없이 구두로만 진행됐다. 그런데 회담에서 필립 제섭 대사의 여비서가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옆방에서 회담 내용을 속기한 것이 맥아더 청문회 과정에서 불거졌다. 맥아더가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을 증명하는 자료여서 맥아더가 항의하는 등 논란거리가 됐다.

트루먼과 맥아더, 상호불신과 불화

트루먼은 맥아더를 군인으로서 존중 존경하지만 “프리마돈나처럼 구는 5성 장군과 도대체 뭘 하란 말인지”라고 자신의 일기에 적은 것처럼 본능적으로 꺼리고 불신했다.

공화당 대선 예비선거에도 출마했던 맥아더는 민주당 소속으로 자신이 싫어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뒤를 이은 트루먼을 좋아하지 않았다. 루즈벨트는 뉴딜정책에 반대하는 등의 이유로 맥아더를 육군참모총장에서 내쫓고 대장에서 소장으로 강등시켰다.

맥아더는 5성의 육군 원수로서 ‘주방위군 대위 출신에 업적도 정치적 능력도 보잘 것 없는 인물이 어떻게 내 위에 있을 수 있나’라며 대통령과 자신을 지휘 계통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핼버스탬, 191쪽)

웨이크섬 회담에서 만난 트루먼에 대해서는 “겉핧기 지식은 있으나 사실의 배후에 깔려있는 논리나 정확한 원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극동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고 폄하했다.(맥아더, 213쪽)

맥아더 청문회

맥아더 해임은 큰 파장을 일으켜 공화당은 트루먼과 애치슨 탄핵까지 거론하며 청문회를 요구했다. 상원 군사위원회와 외교위원회 합동청문회가 5월 3일부터 6월 말 42일간 진행됐다.

맥아더 본인을 불러 공방을 벌인 청문회는 3일간 진행됐다. 맥아더는 대만 국민당군 이용이나 만주 폭격 등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자신의 구상은 한국 전쟁에서의 승리가 목적일 뿐 중국과의 전면전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브래들리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청문회에서 맥아더의 대중국 태도는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을 수반하고 있다며 맥아더의 전략은 ‘미국을 잘못된 전쟁에서 잘못된 시간과 장소에서 잘못된 적에게 몰아넣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루먼 정부는 청문회를 크나큰 승리의 순간으로 기록했다. 오랜 숙적의 발톱을 뽑아버린 것으로 여겼다.(핼버스탬, 954쪽)

하지만 민주당 정권에서 장제스가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에게 내전에 패해 대륙에서 물러났고, 중공군이 개입한 한국전쟁이 3년을 지속하면서 1952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1932년 루즈벨트 집권 이래 20년 만에 정권이 교체됐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맥아더는 미국 1951년 4월 19일 미 상하원 합동회의 고별연설에서 자신의 아시아 중심주의에 대한 철학, 자신이 10개월 가량 지휘했고 아직 진행중이던 6·25 전쟁에 대한 소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했다. 그의 중국에 대한 진단은 ‘전랑(戰狼)외교’라는 말까지 듣는 현재의 중국에도 해당될 듯한 내용이 적지 않다. 다음은 연설요지

아시아

흔히 아시아는 유럽으로 향하는 입구라고 말하지만 유럽이 아시아로 향하는 입구라는 것도 사실이다. 아시아나 유럽이나 어느 한쪽이 가지는 방대한 영향은 반드시 상대방에게도 끼치게 마련이다.
미국의 힘이 아시아와 유럽을 동시에 보호하기에 불충분해 우리의 노력을 분산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보다 더 심한 패배주의를 생각할 수 없다. 우리의 적이 힘을 쪼개 아시아와 유럽을 동시에 공격하면 우리도 동시에 적에 반격하는 도리밖에 없다.

대만의 중요성

태평양 전쟁을 겪으면서 태평양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게 됐다. 어떤 환경에서도 대만이 공산주의자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도 그 이유다. 대만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당장 필리핀의 자유와 일본의 상실을 가져온다. 우리의 서쪽 경계선이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 워싱턴주 해안까지 후퇴하게 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공산 중국에 대한 인식

공산 정권 아래 통일된 중국의 민족주의는 점차 침략적인 경향을 증대시키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중국인들은 자신의 이상과 개념에 입각한 군국주의를 발전시켜왔다. 중공은 아시아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 소련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으나 그 방법과 개념에서는 점차 침략적인 제국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제국주의의 본질인 영토 및 세력 확장을 위한 야욕을 지니게 되었다. 중공 정권에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적은 것 같다.

6·25 제한전에 대한 불만

나는 증원부대를 요청했으나 보낼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압록강 북쪽 적의 보급 기지를 파괴하도록 허가하지 않는다면 대만의 약 60만 명 병력을 한국전에 투입하자고 했다. 그것이 곤란하면 중국 해안을 봉쇄하여 외부로부터 원조를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문제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 사령관으로서의 나의 견해임을 밝혔다. 결과는 나의 입장을 왜곡하고 나를 전쟁 도발자라고 비난했다. 이는 진실과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지휘함 마운트 매킨리 함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한국인의 용기와 신념

한국의 비극은 군사행동이 제한되어 있어 더욱 비참해지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 중 사력을 다해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한국민의 용기와 확고부동한 신념은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전한 최후의 말은 태평양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의 맥아더 장군 흉상. 인천 = 구자룡 기자

‘노병은 죽지 않는다’

이제 52년 군인 생활을 마치려 한다. 내가 입대한 것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내가 웨스트포인트 광장에서 선서를 마친 이래 세계에는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나의 희망과 꿈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나는 초년 장교시절 군대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후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노래의 노병처럼 이제 군대 생활을 끝내고 하느님의 계시에 따라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여 온 한 사람의 노병으로서 사라져간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