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휴전협상, 또 하나의 전쟁(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18회]
‘회담은 아마 한두 달이면 끝날 것 같아’
‘가을에 사과가 빨갛게 익을 때까지 끌 것 같네!’
‘크리스마스 전에 끝나 집으로 가게 되기를 희망해’
1951년 7월 10일 시작된 6·25 전쟁 휴전회담에 유엔군 측 5명의 대표 중 아레이 버크 극동해군 부참모장(준장)은 아내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회담 타결 전망에 비관적이 되어갔다.
협상은 버크의 우려보다 훨씬 길어져 2년도 넘긴 759일간 계속됐다. 협상 시작 후 양측 사망자는 개전 이후 1년과 비교해 3배가량 많았다. 희생을 줄이자는 휴전 협상이 더욱 피를 부르는 역설을 낳았다. (이용호, 107쪽)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휴전 회담 설명. 전쟁이 휴전회담 개시 후 싸우면서 협상하는 국면이 됐다며 공산당과 마오쩌둥 주석은 지구전을 통해 평화를 얻고 전쟁을 끝마치는 방침을 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싸워서 승패 가릴 수 없다’
미국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 북진하며 압록강에 도달할 때까지는 휴전이나 협상을 생각지 않았다. 중공군도 3차 대공세(1950년 12월 31일~1951년 1월 10일)로 서울을 다시 점령할 때까지 남진(南進)에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1951년 4, 5월 이후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점령한 뒤 37도 선까지 내려왔으나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밀려 올라갔다. 4월 이후 두 차례 춘계 공세를 퍼부으면서 70만 명 이상의 대병력을 동원했음에도 중동부 전선은 점점 북으로 밀려 올라갔다.
유엔군은 중동부 전선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다시 38선을 치고 올라갔지만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4월 11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해임은 확전론을 더 이상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왔다. 만주 폭격이나 핵무기 사용 등 ‘확전’은 소련 참전을 불러올 수 있고 3차 대전으로 비화할 우려가 크다고 워싱턴은 판단했다. 유럽 방위에 대한 부담, 38선 돌파 북진 시 20만 명 이상의 추가적인 미군의 인명 손실 우려, 전쟁 장기화에 따른 여론의 피로감 등도 휴전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 1951년 2월 이후 양측 모두 군사적 승리보다 유리한 고지에서 협상하려는 목적으로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분석이 나왔다.(김계동, 272쪽)
1952년 5월 리지웨이에 이어 유엔군사령관에 부임한 마크 클라크는 “공산 측은 최후 공세가 봉쇄되자 재빨리 휴전 회담을 제의해 유엔군의 역공세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휴전 회담에 응했다”고 분석했다.(클라크, 163쪽)
첫 휴전협상 장소로 사용된 개성의 99칸 한옥 ‘내봉장’.
순조롭지 않은 협상 첫 출발
“소련 인민은 한반도의 무력 충돌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단계 토의가 교전국 간에 시작되어 38선에서 군대가 서로 철수할 수 있도록 휴전과 정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야콥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부 대사가 1951년 6월 23일 저녁 유엔의 라디오방송 시리즈 기획 ‘평화의 대가’에서 던진 한마디는 공산권의 첫 공식 휴전 의사 표명이었다.
1주일 후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역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휴전회담을 제의했다. 공산 측은 하루 만에 “개성에서 7월 10~15일 회담하자”고 응답했다. 7월 10일 개성의 99칸 한옥 집 내봉장(來鳳莊)에서 회담이 시작됐다. 그런데 공산 측은 시작부터 기싸움과 선전전에 몰두했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 터너 조이 제독 일행이 헬기에서 내리자 미군에게서 노획한 지프차와 군용트럭에 백색기를 달아 일행을 태운 뒤 회담 장소로 갔다. 회담 장소도 유엔 측이 제시한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를 거부하고 중공 측이 통제하는 개성으로 오게 한 것처럼 유엔군이 정전 협정이 필요해 항복하듯 찾아오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회담장 주변에 배치된 공산 측 병사들은 유엔 측 일행을 포위하고 자동소총을 위협적으로 흔들어대기도 했다. 협상 테이블 위의 공산 측 깃발을 유엔 측보다 더 큰 것으로 가져다 놓는가 하면 동양 문화에서 ‘승자가 남쪽을 향해 앉는다’며 북쪽 편에 공산 측 자리를 배치했다.(이용호, 108쪽)
회담장에 들어가 의자에 앉은 조이 제독은 깜짝 놀랐다. 의자 다리가 짧아 마주 앉은 상대측 대표 남일 앞에서 마치 ‘어뢰를 맞고 침몰하는 해군 제독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의자를 바꿔 앉기 전 공산 측 사진기자들의 촬영은 이미 끝난 뒤였다. 공산 측은 회담 사흘째 유엔 측 기자단 출입을 막으려다 리지웨이 사령관이 “유엔 대표단도 회담장으로 가지 말라”며 강경 대응해 공산 측은 물러섰다.(조이, 11쪽)
1950년 7월 10일 휴전 협상 유엔군 측 대표.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기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해군 중장,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호디스 육군 소장
‘외국군 철수’ 주장, 미 반대로 철회
워싱턴의 휴전 협상 지침은 ‘회담은 군사행동 중지를 위한 정전회담으로 국한해 중공의 유엔 및 안보리 가입이나 지위 문제, 대만 문제, 38선 문제, 군대 철수 등은 배제하라’는 것이었다.
앞서 중공이 2차 대공세(11월 25일∼12월 10일)로 기세를 올리던 1950년 12월 7일 저우언라인(周恩來) 총리가 휴전 조건 5개 항을 제시하는 것 같은 상황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저우 총리는 외국 군대 한반도 철수, 미군 대만해협과 대만 철수, 중공의 유엔 진입과 장제스(蔣介石) 축출 등을 내세웠다. 마치 승전국이 내미는 카드와 비슷했다.(선즈화, 618쪽)
예상대로 공산 측은 휴전회담 첫 회의에서 즉각적인 정전, 38선 중심으로 20km 비무장지대 설치, 모든 포로 교환과 함께 한반도에서 외국군 철수를 포함했다. 중소는 국경만 넘으면 군대를 다시 투입할 수 있지만 (태평양을 건너간) 미군은 돌아오기 어렵다. 미국은 외국 군대 철수는 공산 측에 침략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미국의 강한 반발로 ‘외국 군대 철수’는 안건에 포함되지 않았다.
회담 시작 16일 만에 합의된 의제는 ① 비무장지대 설치 및 군사분계선 설정 ②정전 감시기관 설치 등 정전 휴전 실천 위한 조치 ③포로에 관한 조치 등이었다.
휴전 협상에 참여한 영관급 장교들은 지도를 놓고 군사분계선 경계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협상장에서 전선으로 전화를 걸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점을 묻기도 했다.
군사분계선 기준 실랑이, 접촉선 v. 38선
공산 측은 군사분계선을 전쟁 전의 38선으로 하고 20km의 비무장지대를 둘 것을 제의했다. 옹진반도 등 서부 전선 일부를 제외하고는 38선 이북으로 진출한 아군을 철수시키고 방어할 수 없는 선에 배치하는 것은 사실상 항복에 다름없다고 여겼다. 조이 대표는 “전쟁에서 잃은 것을 회담에서 되찾으려 하지 말라”고 일축했다. 미군은 현 전선에서 북쪽으로 20마일(32km) 넓이를 비무장지대로 하자며 평양 원산선 근처까지 표시된 지도를 들이밀며 맞섰다.(리지웨이, 281쪽)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회담장 주변 중공군 무장병력이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다 항의하면서 며칠을 허비했다. 공산 측은 미 공군기가 회담장 인근 지역을 폭격했다고 주장하며 2개월가량 회담을 중단됐다가 10월 31일 재개됐다.
회담이 멈춘 사이 미군은 7월 30일과 8월 14일 평양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면서 전선을 16km가량 북진시켰다. 그러자 공산 측은 ‘38선 분계선’ 주장을 철회했다. 11월 27일 양측은 지상군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4km 폭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로 38선 이남의 개성과 옹진반도는 북측에 넘겨주고 말았다.
경남 거제의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에 수용소 시설 모형과 체험관을 설치해 놓았다. 거제 = 구자룡 기자
최대 난제 포로교환, 자유 송환 v 강제 송환
짧으면 한두 달 내로 끝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졌던 6·25 전쟁의 휴전 협상이 2년을 끌게 된 가장 큰 변수는 ‘반공(反共) 포로’의 처리 또는 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협상 초기 2만 명의 중공 포로 중 1만5천명이 송환을 거부하는 등 공산 측 포로 중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가면 처벌받을 것을 우려하거나 이전 장제스(蔣介石) 부대 소속으로 북한에 연고가 없어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등 이유는 다양했다.
유엔 측은 인도적 차원에서 포로의 자유의사를 존중한 자발적 송환이 되어야 한다고 한 반면 공산 측은 모든 포로를 자동으로 강제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반공포로의 귀환 거부는 냉전체제가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환영할 일이었다.
공산 측이 강제 송환을 고집한 것은 포로 미귀환으로 체제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막는 것과 함께 아직 전투가 진행 중인 전선에서 투항자를 막으려는 계산도 있었다. 공산 측이 완고하게 버티자 유엔 측은 1952년 10월 회담을 중단해 6개월 후인 이듬해 4월에야 재개됐다.
경남 거제 포로수용소유적박물관. 전쟁 당시 운영됐던 수용소 실태와 포로들의 생활, 특히 포로들의 무장 폭동 등을 설명해 놓았다. 거제 = 구자룡 기자
‘협상 유도용 무력행사’
클라크 사령관은 ‘회담은 협상이 아니라 총포에 의해 타결되었다’고 믿었던 것처럼 공산 측과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이를 돌파하는 것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클라크는 자신이 ‘동양 최대의 심장’이라고 표현한 수풍댐 등 압록강의 5개 발전소에 대해 1952년 6월 23일부터 27일까지 맹폭을 가해 북한이 2주간 정전됐다. 트루먼은 “휴전 협상에서 협력적인 태도를 갖도록 유도하기 위한 목적의 공격”이라고 했다.
7월 11일에는 작전명 ‘프레셔 펌프’로 평양을 향해 1254회 출격해 1500개의 건물을 파괴했다. 8월 4일과 29일에도 평양의 군사 목표물에 대규모 폭격이 진행됐는데 29일 하루에만 1403회 출격해 700t의 폭탄이 투하됐다.(김계동, 333쪽)
전선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루한 공방을 벌이던 포로 협상은 공산 측이 자유 송환과 5개국 중립국 위원회를 통한 심사 및 귀환을 받아들이면서 타결됐다. 클라크의 표현처럼 ‘총포’가 큰 작용을 했다. 초반 협상을 맡았던 리지웨이는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전술은 가혹한 세금처럼 인내심을 시험해 성서 속 인물인 욥이라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리지웨이, 86쪽)
경남 거제포로소 유적박물관에 공산 포로들이 포로수용소장을 감금하는 등 무장 폭동을 일으킨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거제 = 구자룡 기자
거제포로수용소의 64야전 병원 VIP 하우스의 벽난로 굴뚝만 남아있다. 거제 = 구자룡 기자
거제포로수용소의 64야전 병원 VIP 하우스의 모습.
‘포로에게 포로가 되다’
6·25 전쟁 포로 문제는 ‘반공 포로’의 송환을 두고 휴전 협상에서 큰 걸림돌이 됐을 뿐만 아니라 수용소 관리에서도 역사적으로 유례를 보기 드문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공산 측은 공작대원들을 포로로 가장해 수용소 내로 잠입시키거나 친공 포로들을 전투요원으로 이용하는 ‘제6열 작전’을 전개했다. 이들은 공산 측의 지령에 따라 판문점 휴전 협상과 연계한 활동을 벌였다. 포로들을 분산 수용하려고 하자 거제 76수용소에서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지하도를 파고 무기를 확보하는 등 전투 계획서까지 발견됐다. 수용소 측은 공산 공작대원과 포로들 간의 간첩 연락 아지트로 사용되고 있던 수용소 주변의 민간인 부락을 철거시키기도 했다.
경남 거제의 포로수용소유적공원 입구. 거제 = 구자룡 기자
1951년 중반 거제수용소의 북한군 포로가 2만 명에 육박했는데 수용소 내 친공 포로들은 정치 보위부, 조직 및 기획 전담, 경비대, 선전 선동 부서를 두어 마치 ‘포로 공화국’을 방불케 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재판을 하고 사형까지 집행하는 집행대가 있을 정도였다. 수용소에 반미 구호가 적힌 현수막, 심지어 인공기도 내걸었다. 1952년 12월 거제 봉암도(추봉도) 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집단 시위를 벌여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쌍방간 교전으로 포로 85명이 사살되고 113명이 부상했다. 포로수용소도 후방의 전선이었다.(클라크, 113쪽)
1952년 5월 거제 포로수용소장 납치 사건도 이런 분위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포로에게 포로가 되는 난센스가 벌어진 것이다.(클라크, 87쪽) 포로들은 프란시스 도드 포로수용소장(준장)을 납치해 인질극을 벌이다 3일 후 풀어주었다. 이들은 석방 조건으로 수용소 자치화, 자유 결사 허용, 수용소 막사 간 연락 전화 가설 등을 요구하고 반공포로 심사 중단을 요구했다. 포로수용소장 납치 사건을 계기로 수용소 내에서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간에 내란에 버금가는 8개월간에 걸친 피 묻은 투쟁사가 드러나기도 했다. 수용소 내 시위 폭동 반란 탈옥 반공포로 탄압 등이 적절히 관리되지 못한 데는 수용 인원을 초과한 데다 관리를 위해 배치한 인력이 필요한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리지웨이는 진단했다.(리지웨이, 286쪽)
경남 거제의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유엔군 참전국 국기와 철모 조형물. 국군과 북한군이 철조망을 함께 걷어내 화합과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거제 = 구자룡 기자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