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휴전협상, 또 하나의 전쟁(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 정전협상 중 더욱 치열했던 혈전들


강원도 고성의 화진포 옆 ‘김일성 별장’. 6·25 전쟁 이전 38선 이북에 있었던 이곳을 김일성 일가가 별장으로 사용했다. 고성 = 구자룡 기자

강원도 고성 ‘김일성 별장’ 기념관에 김정일이 여섯 살에 와서 찍은 사진을 전시해 놓았다. 고성 = 구자룡 기자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 협상이 시작된 후에는 38선 인근에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졌다. 미군의 막강한 공군 및 화력을 실감한 중공군은 1953년 정전 협상 타결이 임박한 시기 최후의 공세까지 2년여간 대규모 공세는 중단했다. 대신 거대한 규모의 땅굴을 파고 버티며 기회를 노렸다.

피의 능선이 전투 후 나무마져 앙상하게 남아있다. 전쟁기념관 전시.

정전 협상 중 양구에서는 도솔산, 펀치볼, 단장의 능선 전투 등 규모가 큰 것만도 9개의 전투가 벌어져 9개의 전적비 기념비가 숲처럼 세워져 있다. 출처 양구군청 홈페이지

 피로 물들인 단장(斷腸)의 능선 전투들

강원도 양구 방산면에서 국군 5사단이 북한군 12사단과 벌인 ‘피의 능선 전투’(1951년 8월 16일~22일)는 미군 부대가 실패한 작전을 넘겨받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고지쟁탈전이었다. 공격 목표로 삼은 T,U,V 등의 주요 고지를 연결한 능선이 피로 물들었다.

그해 ‘단장의 능선전투’(9월 13일~10월 15일)는 양구 방산면과 동면 일대에서 미 제2사단이 중공군과 북한군이 벌인 접전으로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은 종군기자들이 붙여준 표현이다. 아군은 한 달여 전투 끝에 능선을 추가 점령해 전선을 북쪽으로 올렸다. 아군은 3700여명이 전사한 반면 공산군 피해는 2만1000여명에 달했다.(온창일, 257쪽)

양구전쟁기념관에는 1951년 6월부터 12월까지 벌어졌던 도솔산, 피의 능선, 펀치볼, 단장의 능선 등 9개 전투가 9개 기둥에 새겨져 있다. 전적비의 숲이 고지전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전북 남원 지리산 뱀사골 입구에 세워진 지리산지구 전적비. 남원=구자룡 기자

전북 남원 지리산 뱀사골 입구에 세워진 지리산 충혼탑. 공비토벌 과정에서 희생된 민 경 군 7200여명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남원=구자룡 기자

 ‘작전명 쥐잡이’ 지리산 공비토벌

1951년 7월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된 뒤 38선 주변에서 대치와 고지전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후방인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무장공비도 골칫거리였다. 군은 당시 이상현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부군단 약 3800명이 지리산 일대에 출몰하는 것으로 파악했다.(백선엽, 2009, 264쪽) 주력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이 반격 작전을 개시한 뒤 북으로 가는 퇴로가 막힌 북한군 정규군이었다. 여기에 각 지역의 남로당 조직과 여순 사건에 가담한 좌익 무장 세력 등이었다.

공비토벌은 휴전협상 초기 협상 대표로 참여했다가 전방 1군단장으로 옮긴 백선엽 소장이 ‘백(白) 야전전투사령부’라는 특수 임무를 띤 부대를 조직해 맡게 됐다. 수도사단과 8사단 등이 투입된 백사령부는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3차례에 걸쳐 지리산을 포위해 좁혀가는 ‘토끼몰이’ 방식으로 소탕했다. 육군본부 자료에는 사살 5800여명, 포로 5700여명이었다. 일부 잔당은 휴전 후까지 출몰했으나 공비토벌은 일단락됐다.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세워져 있는 ‘백마고지 삼용사의 상’. 구자룡 기자

백마고지 쟁탈전에서 소모된 포탄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전쟁기념관 전시.

‘삼용사’가 실마리 푼 백마고지 전투

중공군 3개 사단으로 구성된 38군은 1952년 10월 6일 강원도 철원의 ‘395고지’ 공격을 시작한다. 국군 부대는 전쟁 기간 승패와 영욕을 겪은 김종오 사단장의 9사단. 15일까지 육탄전을 벌이며 24회나 뺏고 뺏기는 대혈전이었다. 중공군은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1만5천명이 사망했고 국군도 3천4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투의 실마리는 ‘백마고지 3용사’가 풀었다. 전투 시작 1주일째인 10월 12일 제30연대 제1대대는 백마고지 9부 능선에 설치된 적 기관총 화력에 피해만 입고 공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포병이나 공군 화력으로도 제압되지 않았다. 이때 3중대 1소대장 강봉우 소위는 오귀봉, 안영권 하사와 함께 수류탄을 들고 적진지에 뛰어들어 기관총 진지를 폭파하고 자신들도 장렬하게 전사했다. 백마고지는 이후 다시는 적에게 내주지 않았다. 서울 능동어린이공원에 ‘백마고지 삼용사의 상’이 있다.

무명의 봉우리 ‘395고지’가 백마고지로 불린 유래는 명확지 않다. 작전 기간 중 포격에 의하여 산 정상의 수림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 뒤 나타난 산의 형태가 마치 누워 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종군기자들이 수많은 조명탄 아래로 하얀 낙하산 천에 뒤덮인 산의 지세를 보고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온창일, 279쪽)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상감령전투 안내문. 중국이 대표적인 승리라고 주장하는 상감령 전투에 대해서는 별도의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상감령과 저격능선, 삼각고지

저격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에 자리 잡은 오성산과 인접한 남대천 부근에 솟아오른 해발 580m의 무명능선이다. 저격능선(Sniper Ridge)이라는 명칭은 1951년 10월 중공군 제26군이 이 능선에서 미 제25사단을 저격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중공군에게는 오성산을 방어하기 위한 중요 관문이었고, 국군 제2사단에는 사단 주저항선을 감시하는 위협요소를 없애고 오성산 공격의 발판이 되는 고지였다.

양측이 방어 전면 약 800m를 두고 6주가량 전투를 벌였다. 미 7사단은 인근의 삼각고지,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을 공격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중국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을 합쳐 ‘상감령’으로 부른다.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한 달 이상 전투 결과 중공군 전사자가 3배 이상이지만 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한 채로 전투가 끝났다. 중국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대승리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경기 연천의 최전방 포스트인 태풍전망대. 철책 너머 임진강 건너편에 베티고지가 있다. 연천 = 구자룡 기자

경기도 파주 통일공원의 김만술 소위 흉상. 파주 = 구자룡 기자

최후의 혈전, 금성고지와 베티고지 전투

강원도 화천 북방에서의 금성샛별고지 전투(1953년 7월 13~19일)는 정전 협정 1주일 전에 끝났다. 국군 제2군단이 초기에 금성 돌출부를 상실했지만, 중공군 5개군 15개 사단의 공세를 저지하고 이후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펼쳐 금성을 회복하고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끝냈다. 1주일가량의 전투에서 국군은 1만 4373명(전사 부상 실종 포함), 중공군은 6만 6000여 명의 병력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4km가량 전선을 밀어 올리는 대가치고는 엄청나게 큰 대가를 치렀다.

정전협정 직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이틀간 벌인 베티고지 전투(7월 15〜16일)는 국군 제1사단의 1개 소대가 중공군 3개 대대 병력과 싸워 고지를 끝까지 사수한 기적 같은 전투였다. 이틀간의 전투에서 적은 314명이 사살된 반면 아군 전사자는 6명에 그쳤다. 소대장 김만술 소위는 한국과 미국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았다.

경기도 연천군 베티고지는 임진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이곳을 뺏기면 휴전선이 10km 이상 남쪽으로 밀려 임진강 남쪽으로 그어질 수도 있었다. 중공군은 15일 오후 5시부터 이튿날 오전 7시 반까지 19차례에 걸쳐 아군 교통호까지 밀고 들어와 총검과 육박전을 벌였다. 베티고지 전투는 영화 ‘격퇴’(1956)와 ‘베티고지의 영웅들’(1980)의 소재가 됐다.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베티고지가 임진강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태풍전망대에서는 매년 호국영령 추도식이 열린다.

경기도 연천 태풍전망대의 베티고지 참전용사 충용탑. 탑의 3명의 용사는 전투에서 생존한 장병들이다. 연천 = 구자룡 기자


참고 문헌
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박권영 옮김,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플래닛미디어, 2023.
백선엽 지음, 『군과 나』, 서울: 시대정신, 2009.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 『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
온창일 등 지음, 『6·25 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
정일화 지음, 『휴전회담과 이승만』, 선한약속, 2014.
터너 조이 지음, 김홍열 옮김,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3.
『정경문화』 이용호, 1983년 7월호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