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상처투성이 정전협정 70년(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20회]

교동도의 분단과 휴전의 상처

강화도를 지나 교동도의 대룡시장 교동이발관. 바다 건너 황해도 연백군에서 건너온 6·25 전쟁 피란민 1세대 지모 씨가 60여년 자리를 지켰던 곳이다. 자손들이 술빵 등 다양한 음식을 팔지만 이발관 간판은 그대로 두고 있다. 교동도 = 구자룡 기자

교동도 대룡시장에는 황해도 연백군에서 온 피란민들이 하는 가게들이 있어 간판이나 메뉴에 ‘연백’이 들어간 곳이 종종 눈에 띈다. 교동도 = 구자룡 기자

강화도에서 교동대교를 건너면 나타나는 교동도(喬桐島)의 대룡시장. 과거가 마치 영화세트장처럼 남아 분단과 휴전의 흔적을 보여주는 곳이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될 때 황해도 연백군(현재는 연안군과 배천군)의 남쪽은 경기도에 편입됐지만 1953년 7월 휴전 이후 북한 땅으로 남았다. 피란 온 3만여 명의 연백군 주민들은 돌아가지 못하고 고향 연백시장을 본떠 전통시장 거리를 조성했다.

단층 가게와 좁고 굽은 골목, 이발관 다방 과잣집 등의 예스러운 간판 중에 ‘황해도 연백차떡’ ‘연백 강아지떡’처럼 고향인 연백을 넣은 것도 종종 눈에 띈다. ‘교동 이발관’은 피란민 1세대인 지모 씨가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내려와 60여년 같은 장소에서 일했던 곳으로 지금은 자손들이 간판은 그대로 두고 술빵과 국수 등을 팔고 있다.

교동도의 유격군 충혼 전적비. 교동도 = 구자룡 기자

교동도 인사리의 북진나루에서 북한 황해남도 호동면까지는 불과 2.6km. 북쪽 해안에서 육안으로도 북한 땅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바다의 경계선이 교동도를 남한 속의 북한 땅으로 만들었다. 북한 해안을 마주 보는 고구리 해안에는 ‘UN8240 을지 타이거 여단 충혼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충혼탑에는 ‘군번도 계급도 없는 육군 을지 제2병단과 유격군 8240부대 타이거 여단 이름의 방공 유격대 용사들의 넋이 잠들어 있다’고 씌어 있다. 섬 곳곳에는 방공 대피소가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북한에서 군인이나 주민이 바다를 헤엄쳐 넘어와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철조망도 쳐 있다. 서해에서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분단의 최전선이다.

교동도 북쪽에서 바라본 북한. 바다건너 과거 연백군은 가까운 곳은 불과 2.6km에 불과해 날이 맑으면 훤히 바라보인다. 철조망은 북한 주민이 헤엄쳐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교동도 = 구자룡 기자


해상의 휴전선 ‘북방한계선(NLL)’

교동도 북쪽 해안을 지나는 NLL은 휴전협정 서명 한 달가량 지난 8월 30일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해상에서의 정전협정 관리를 위해 설정한 것이다. 휴전협정 당시 육상 군사분계선은 설정됐지만 해상경계선은 별도의 협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엔군사령부는 구체적인 내용을 즉시 북측에 통보했다.(남도현, 374쪽)

NLL은 우리 군의 해양 작전 북방한계선을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의 서해 5개 섬과 북측 관할 옹진반도의 중간지점으로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1972년까지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11조는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 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는 서해의 말도를 시작으로 12개의 좌표를 표시해 놓고 오랜 기간 관리해왔다.

육상 군사분계선 설정 원칙은 협상 체결 당시의 전투경계선이었다. 해양에서도 NLL 설정 당시 아군이 장악하고 있던 도서와 바다를 연결해 분계선을 긋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다 북한은 육상 전력에 비해 해군력은 약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NLL은 남한 해군이 이 선을 넘어 북쪽으로 가지 않겠다는 통보였다. NLL 설정 당시 NLL 북쪽의 서해와 동해에는 국군이 상당수 섬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군사령관이 한국군에 제시한 제한이었다.

NLL 설정으로 해병대가 피와 땀으로 차지했던 옹진반도 북서쪽의 초도와 석도, 원산 앞바다의 여도 명도 등 전략적 요충의 섬들이 NLL 북쪽에 있다는 이유로 북한에 내주게 됐다. 그럼에도 북한이 뒤늦게 시비를 걸고 나온 데는 휴전협상에서 합의 문서로 해양한계선을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전 70년이 되었으나 분쟁과 갈등의 ‘휴화산’처럼 남아있다.(남도현, 391쪽)

경기도 파주 임진각의 제3 땅굴 조형물. 파주 = 구자룡 기자

경기도 파주 임진각 제3 땅굴 도보관람로. 북한이 파내려 오다 중단한 곳까지 358m 경사로를 안전모를 쓰고 걸어들어간다. 유료 모노레일을 타고 들어갈 수도 있다. 파주 = 구자룡 기자

강원도 양구의 제4땅굴 앞에 관람객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중공군에 배운 땅굴, 휴전선 침투 ‘두더지 작전’

“여러분은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한 명백한 증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임진각을 찾는 관광객들이 도라전망대와 함께 찾는 3호 땅굴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외국인들에게 설명하는 말이다. 6월 찾아가 본 3호 땅굴 전시관의 설명 자료에는 높이가 2m지만 일반에 개방된 ‘도보 관람로’의 땅굴은 높이가 1m 남짓에 불과했다. 천장이 모두 바위여서 성인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야 하고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으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포격과 공중 폭격 등 화력을 피하기 위해 땅굴을 팠으나 북한군은 휴전선을 지하로 침투하기 위해 두더지 작전을 펴다 발각된 것이다.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의 모습.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당시 미군 장교 2명이 희생된 미루나무가 있던 곳에 세워진 표지석.

협정이 무색한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남쪽 초소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지휘하던 유엔군 소속 미군 아서 조지 보나파스 대위와 마크 토머스 배럿 중위가 갑자기 달려든 북한 병사들에게 도끼로 머리를 맞아 후송 중 사망했다. 북한 병사 30여명의 무차별 공격으로 한국과 미국 장병 9명이 부상했다.

미군은 미루나무를 밑동에서부터 잘라버리는 ‘폴 버니언’ 작전을 벌였다. 북한의 반발에 대비해 미국은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20대, B-52 전폭기 3대, F-4 팬텀 전투기 24대가 출동했고, 제7함대 항공모함 미드웨이를 동해로 보냈다. 한국 특전사는 북한 초소 4곳을 초토화했다. 유엔 측 경비대대 캠프 이름도 ‘캠프 보나파스’로 바꿨다. 사건 후 충돌을 막기 위해 공동경비구역(JSA) 내부에 남북 경계선이 그어졌다.

긴장과 정적이 흐르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정전 협정으로 군사분계선을 따라 이런 표지주가 약 200m 간격으로 1292개가 설치됐다.

누더기가 된 정전협정

2022년 12월 북한 무인기 5대가 사흘간 서울과 경기 인천 상공을 휘젓고 돌아갔다. 국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무인기 ‘송골매’ 2대를 군사분계선 북쪽 5km 상공까지 올려보냈다고 밝혔다. 유엔사령부는 “남북 무인기 모두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했다. 정전협정은 체결 70년을 맞은 오늘도 끊임없이 위반 논란을 빚고 있다.

정전협정에 따라 양측은 1953년 7월 30일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감호에 이르는 155마일(약 248km)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방 약 2km 폭의 비무장지대(DMZ)에서 군사력 철수를 마쳤다. 8월 2일에는 서해 5도 이외 동해안과 서해안의 DMZ 이북 도서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모두 돌아왔다.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북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주가 약 200m 간격으로 1292개가 설치됐다. DMZ 내에서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허용되지 않으며 군사정전위 허가 없는 인원 출입도 금지됐다.

전쟁 3년, 협상 2년이 걸려 가까스로 맺어진 정전협정. 군사분계선과 DMZ를 두고 정화(停火·총격을 멈춤)를 보장하며 정전을 유지 관리하기 위한 군사정전위, 중립국감독위를 설치 운영하기로 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총격 포격 폭침 항공기 테러 등 무력도발이 계속됐다. 군사정전위가 관할하는 ‘남북한에 새로운 무기를 들여와서는 안 되며 기존 무기 교체도 1:1로 해야 한다’(협정 2조 13항) 등 많은 조항은 사문화됐다.

중립국감독위 4개국 중 2개국은 북한 쪽이 폴란드와 체코를 지명했다. 탈냉전 후 북한이 지명한 공산국가들이 자유진영으로 돌아오자 북한은 두 국가 대표를 추방해 중감위 활동이 무력화됐다. 심지어 북한은 2013년 3월 한미연합훈련을 빌미로 협정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다. 일방의 선언만으로 폐지되지는 않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 시기에 재래식 무기의 증강과 충돌을 막기 위한 협정은 수명을 다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휴전선과 DMZ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유엔사가 관리하는 협정을 통해 한반도에서 무력 충돌이 빚어지지 않고 평화가 유지되어 왔다는 평가가 많다.(‘2023년 정전협정 및 한미동맹 70주년 학술회의’ 자료집, 42쪽)

국방부에 따르면 정전협정 체결 이후 70년 동안 한국군 4268명, 미군 92명 등 모두 4360명이 무장 충돌 등으로 전사했다. 연평도 포격이나 천안함 폭침 등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대규모 무력 충돌은 없었고 전쟁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피와 희생으로 정전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경기 파주군 적성면의 북한군 중국군 묘지. 초기의 봉분은 평면 표지석으로 바뀌었다. 파주 = 구자룡 기자

신원이 확인된 중국군 유해는 모두 중국으로 송환됐다. 신원이 확인 안 된 중국군 일부가 ‘무명인’으로 남아있다. 파주 = 구자룡 기자

경기 파주군 북한군 중국군 묘지 안내판. 관리가 안 돼 간판이 깨지고 너덜너덜해졌다. 파주 = 구자룡 기자

‘적군 묘지’와 유해 송환

정전 70년을 하루 앞둔 7월 26일 6·25 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 7위가 73년 만에 하와이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일하게 신원이 확인된 고 최임락 일병은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북한이 수습해 1995년 미국으로 송환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 해군 최초의 흑인 비행사 제스 브라운의 동료 비행사 톰 허드너는 북한 당국의 안내로 장진호에서 브라운의 유해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남방한계선 남쪽 5km 경기 파주 적성면의 ‘북한군과 중국군 묘지(적군 묘지)’에는 6·25 전쟁 사망하거나 그 후 무장공비 등 109구의 북한군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묘지 방향이 임진강 건너 북녘땅을 바라보게 배치되어 있다. 돌아가지 못한 고향 땅을 죽어서라도 바라볼 수 있게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문관현, 362쪽)

제2 묘역에 안장됐던 중공군 유해 541구는 2014~6년 3차례에 걸쳐 본국으로 송환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6월 중국 방문 중 중공군 유해 송환 의사를 밝혀 이듬해부터 중국으로 보내졌다. 중국은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조성해 안장했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송환됐으나 횡성지구 전투 등에서 수습된 ‘무명인’ 유해는 몇 구가 그대로 남아있다. 북한군과 중국군 모두 초기에 조성했던 봉분은 모두 없어지고 평면 대리석 표지석으로 바뀌었다. 적군묘지 조성은 적군이라도 사망했을 경우 매장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 추가의정서 34조에 따른 조치다. 정전 70년의 세월 속에 전사자에 대한 상호간 예우는 지켜지고 있는 모습이다.

경북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의 ‘끝나지 않은 전쟁’ 안내문. 정전 협정 이후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협정을 위반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칠곡 = 구자룡 기자

북한은 정전 70년을 맞은 2023년 6월 25일 심야에서 ‘전승절’ 대규모 야간 열병식을 개최했다.

‘끝나지 않은 전쟁’

다부동 전적기념관 내부 전시의 마지막 항목이 나가려는 발길을 잡았다.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다. 4차례 땅굴 굴착, 울진 삼척과 강을 잠수함 무장공비, KAL 858 폭파 등 테러가 있었다.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그리고 연평도 포격 등은 ‘전쟁 도발’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6차례의 핵실험이다.

북한은 정전 70년을 맞은 6월 27일 밤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괴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불리는 화성-17호와 화성-18호 등을 과시하는 대규모 야간 열병식을 가졌다. 여기에는 중국 리훙중(李鴻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 부위원장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도 참석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이 열린 부산 ‘영화의 전당’은 6·25 전쟁에 처음 파병된 미 지상군 24사단 스미스 특수임무대대가 처음 도착한 곳이다. 한반도의 안보 시계는 마치 70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린 듯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곧 끝날 것 같지도 않은 것이 엄중한 현실이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