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자유의 수호자들’(下)(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23회]
밴플리트(1892〜1992)는 8군 사령관에서 유엔군사령관으로 영전해 자신의 상관이 된 리지웨이에 비해 육군사관학교 2년 선배다. 두 사람은 2차 대전 중에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리지웨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밴플리트가 8군 사령관으로 투입된 것은 그가 그리스에서 1948년 2월부터 1950년 7월까지 공산게릴라 소탕 작전을 완벽하게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마셜 국방장관의 강력한 추천을 트루먼 대통령이 수용했다.
그리스 공산 게릴라 토벌한 밴플리트
밴플리트가 부임한 1951년 4월은 공산측과 휴전이 모색되던 때였다. 7월부터는 정전 협상이 시작됐다. 그가 1953년 2월 떠날 때까지 약 2년간 미군 수뇌부는 ‘승리’보다는 ‘패하지 않는 전쟁’에 더 관심을 두었다.
이런 분위기는 ‘승리말고는 대안은 없다’는 맥아더와 소신이 같았던 밴플리트와는 맞지 않았다. 그는 휴전 정책이 군사적 승리를 가로 막고 있다고 생각했다.(남정욱, 11쪽) 그는 휴전 협상중에도 전선의 북상을 원했다. 중공군이 70만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1951년 4월과 5월 두 차례의 춘계 대공세를 폈으나 격퇴된 것도 밴플리트의 ‘공산 게릴라 토벌’ 같은 단호한 대응 때문이었다.
밴플리트는 부임 직후 서울 광화문에서 마포 한강변까지 155mm와 105mm 야포 400문을 세워 놓고 밤낮없이 포격을 가했다.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말이 있다. 좌표를 찍어 적정량을 쏘는 것이 아니라 물량 공세를 펴는 것이다. ‘400문 야포’ 시위도 그 중 하나였다. 서울 재탈환을 목표로 한 대규모 중공군 공세 앞에서 서울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미 의회 등에서 탄약 소모량이 너무 많다고 문제를 제기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중공군의 대공세는 밴플리트의 2년 재임 기간에는 다시는 펼쳐지지 않았다. 다만 휴전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수세적인 리지웨이가 1년간 유엔군사령관으로 있는 동안 그의 공격적인 계획은 종종 제동이 걸렸다. 리지웨이가 소극적이고 수세적으로 대응한 대표적인 조치가 밴 플리트가 최북단 통제선으로 설정한 와이오밍선(연천∼고대산∼화천) 이북으로 진격할 때는 도쿄 사령부의 승인을 받도록 한 것이다. 밴플리트의 탈롱스 작전(맹금 발톱작전), 랭글러 계획(대타격 작전) 등은 동부 전선의 방어선을 밀어올리거나, 평강〜금성〜고지 선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모두 승인을 받지 못했다.
작전 제약 속에서도 휴전선이 지금과 비슷한 위치로 형성된 것은 밴플리트의 공세작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공산 게릴라 토벌의 경험은 1951년 말 백선엽 지휘하에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도 적극 나서도록 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사령관.
밴 플리트, 이승만과 가장 가까웠던 미 사령관
한국을 관할하는 미국 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은 서로 껄끄러운 일이 많았다. 인간적인 요소가 작용할 때도 있었지만 주로는 서로의 지위와 역할이 달랐기 때문이다.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상대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워커는 개전 초기 낙동강까지 밀려만 가는 것에 이승만은 불만을 나타냈다. 북진과 통일에 모두 거부감을 가졌던 리지웨이와는 ‘물과 기름’이었다.
밴플리트는 한국에 부임해 처음 이승만을 알게 됐지만 애국과 열정을 존경해 자국의 국가지도자처럼, 이승만은 친자식처럼 대할 정도로 친밀했다.(남정욱, 89쪽) 그는 지휘 계통상 작전 활동 제약으로 군사적 행동을 하지는 못했으나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을 이해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밴플리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했고, 8군 사령관을 마치고 떠날 때는 태극무공훈장을 주었다. 밴플리트는 1953년 3월 전역 후 아이젠하워로부터 주한 미 대사직을 제안받았으나 바로 거절했다. 부임하면 직책상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맞서야 했고 휴전을 반대하는 그의 소신과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밴플리트 사령관
한국 국방과 한미 우호의 초석닦은 은인(恩人)
밴플리트는 6·25 전쟁 3년간 6명의 유엔군사령관과 미 8군 사령관 중 가장 긴 2년간 근무했다. 중공군의 2차례 춘계 대공세를 격퇴한 후에는 휴전회담속에 지리한 고지전을 이어가던 때였다. 밴플리트는 향후 분계선이 될 대치 전선을 밀어올리는 공세를 펴면서도 한국군 전력을 증강하는 많은 조치들을 취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초급 장교 육성을 위해 육군사관학교를 4년제로 전환하고 국군 20개 사단의 증편, 국군 장교들의 미 군사학교 유학 등이 대표적이다. 백선엽은 105mm 포 밖에 없었던 한국군이 1952년 4월 한국군 포병으로 이뤄진 155mm 포 4개 대대를 보유한 2군단의 재창설은 한국군 현대화에 큰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백선엽, 2009, 88쪽)
한국에서 38년의 군경력을 마친 밴플리트는 한국을 제2의 조국이라고 여기며 한국과 한국군의 발전, 한미 우호 증진을 위해 헌신했다.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참여한 ‘코리아 소사이어티’라는 민간단체를 만들어 한국을 지원하고 한미 우호 증진에 기여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1992년부터는 한미우호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밴플리트 상을 수여하고 있다. 미국의 카터와 아버지 부시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키신저, 이건희 정몽구 등이 이 상을 받았다. ‘한국 육군사관학교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밴 플리트는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1960년 미 사령관으로는 유일하게 동상이 건립됐다.
마크 클라크 사령관.
이승만 제어하면서 존경한 클라크 사령관
클라크 사령관(1896∼1984)이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한 1952년 5월 7일 거제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수용소장을 포로로 잡는 폭동이 일어났다. 휴전협상의 마무리를 위해 파견된 그의 임무가 얼마나 험난한 지 첫날부터 잘 보여주었다.
클라크는 공산측이 휴전 회담 기간에 땅굴을 파는 등 방위선 구축을 위해 이용했다고 보고 있었다. 그는 회담은 결국 협상이 아니라 총포에 의해 타결되었다고 생각했다. 회담 중 수풍댐이나 평양에 대규모 폭격을 가한 것도 그 때문이다.
클라크는 휴전 회담을 위해 넘어서야 할 장애가 한국의 안전보장 없는 휴전을 단호히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유일한 무기는 힘’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대해 누구보다 공감했다. 미 정부의 지휘를 받는 신분이자 유엔군사령관으로서의 역할 때문에 정전 협정에 끝내 협조하지 않으면 이승만을 하야시키는 ‘에버레디 계획’까지 세우고 이승만이 협정의 조건으로 요구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반대했지만 이승만의 반공 신념에는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고 존경을 나타냈다.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클라크 사령관. 그는 ‘승리하지 못한 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것에 대해 패배감을 느낀다고 회고록에서 소회를 밝혔다.
‘맥아더 확전론’에 공감한 클라크
클라크는 부친이 참모학교 소령일 때 맥아더가 중위로 집에 찾아오면서부터 친교가 있는 사이. 1951년 2월 현장 실태 조사를 위해 한국에 왔을 때 만난 맥아더는 압록강 이북 중공군 기지 공격을 막는 워싱턴 합참을 비판하는 얘기를 들었다. 훗날 1974년 출판된 자서전 ‘댜뉴브에서 압록강까지’에서 “중공군이 개입한 이상 압록강 이북에 적의 안전지대를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맥아더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했고, 그후에도 견해를 바꾼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전임자인 리지웨이와 동기로 밀접한 관계라고 했지만 한국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클라크, 65쪽)
클라크는 자신이 미 정부의 지시와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현장 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역사는 휴전을 앞세운 미국의 주장보다 이승만이 더 정당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훗날 자서전에서 극찬했다.(클라크, 19쪽). 그가 유럽 전선 ‘다뉴브’에서 겪은 공산주의자의 경험 때문이었다. 휴전협정에 서명하면서도 ‘승리없는 휴전에 서명한 첫 미군 사령관’이라며 불명예스럽게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맥스웰 테일러 사령관. 출처 영문 위키
‘휴전을 위한 군정가 테일러’
테일러(1901∼1987)는 휴전 협상 막판인 1953년 1월 부임했다. 2차 대전 중 101공수사단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고 베를린 봉쇄 사태 당시 서베를린 주둔 미군 사령관을 역임한 맹장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포병 출신으로 7개 언어가 가능한 명석한 인물로 군정가로도 손꼽혀 그의 임명은 휴전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평가했다.(백선엽, 2009, 317쪽)
군의 경제적 운용을 강조해 탄약과 물자의 소모에 강력한 통제를 가한 테일러는 중공군 격퇴를 위해 적정량을 따지지 않고 포탄을 퍼부었던 ‘밴플리트 탄약’과는 달랐다.
경기 오산의 ‘초전기념관’에 전시된 딘 소장 사진. 오산 = 구자룡 기자
포로 교환으로 3년 만에 돌아온 딘 24사단장
딘 소장은 북한군과의 초전인 죽미령 전투에 투입된 미 24사단 사단장으로 한국에 왔다가 대전 전투에서 후퇴하는 과정에서 ‘실종’됐다 포로가 됐다. 그는 “전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이다”라는 신념이 있어 2차 대전에서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포로가 적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6·25 전쟁에서 자신이 포로가 됐다. 전쟁 중 포로가 된 유일한 미군 장성이다.(최상진, 41쪽)
딘은 부대가 대전에서 북한군에 3면으로 포위된 상황에서 직접 3.5인치 바주카포를 들고 전차에 맞서기도 했으나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대전에서 처음 고립될 때는 17명의 미군 병사와 함께 있었지만 부상한 병사에게 물을 구해주러 나섰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진 뒤 혼자가 됐다.
지리를 모르는 딘 소장은 60km 떨어진 무주까지 이동했다. 그는 완주군에서 주민 한 모씨에게 돈을 주고 대구로 가는 길 안내를 맡겼는데 그가 북한군에 밀고해 포로가 됐다. 한 씨는 전쟁 후 체포돼 5년형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전주 형무소에 갇혔다가 나중에는 평양, 압록강 인근의 만포진 포로수용소, 심지어는 만주 지역으로 이동해 포로 생활을 했다. 3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휴전 후 돌아왔다. 그는 만포진 수용소에게서 안흥만이라는 북한군 장교에게 몰래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백선엽이 부산에서 5연대장을 할 때 부하였으나 전쟁 직후 북한군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백선엽 2권, 217쪽)
그는 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 1953년 9월 4일 낙동강방어선이 무너진 뒤 투항한 북한군 중좌 이학구와 포로교환으로 귀환했다. 미 의회는 1951년 1월 그에게 미군에 최고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최상진, 45쪽). 그는 포로 경험 등을 담은 자서전 ‘General Dean’s Story’(1954)를 남겼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