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문
제목[변영욱] 왜 북한에서만 이미지 정치 실험실인가
■ 북한 이미지정치 리포트 / 2026년 9월
● 반복되는 질문
지난 석 달 동안 이 리포트는 탄광 사진, 해방탑 앞의 연분홍 정장,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만들어진 국무위원장 엠블럼을 들여다봤다. 매번 같은 질문이 따라붙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더 정확히는 이런 질문이다. 왜 북한의 이미지는 매번 주인공 또는 연출자의 의도대로 사진에 담겨 성공적으로 지면에 안착하고, 또 반복되는가. 왜 그 연출은 표면적으로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가.
그리고 엠블럼은 특히 흥미로운 사례다. 김일성도, 김정일도 쓰지 않았던 문화였다. 그것을 북미 회담 직전에 전격적으로 도입했다. 미국 대통령직의 시각적 관행을 참조해 없던 것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엠블럼은 반박되지 않은 채 참매 1호 동체에서 연단으로, 물컵으로, 공식 봉투로 확산됐다. 카운터 프레임이 없는 사회에서 권력이 새로운 시각 문화를 만드는 속도와 방식이 여기 있다.
● 카운터 프레임의 부재
어느 사회에서나 권력은 자신에게 유리한 이미지를 원한다. 그것은 북한만의 욕망이 아니다. 그러나 자유 언론이 있는 사회에서는 같은 장면을 다른 앵글로 찍는 카메라가 반드시 존재한다. 공식 사진기자가 지도자의 웃는 얼굴을 찍을 때, 다른 기자는 행사장 밖의 표정을 찍는다. 경제 성과를 선언하는 사진이 나올 때, 다른 매체는 그 수치가 빠뜨린 것을 찾는다. 이것이 카운터 프레임이다.
북한에는 없다. 김정은이 탄광의 "세기적 낙후성"을 직접 인정한 날, 노동신문은 조명을 가져다 그 탄광을 밝게 찍었다. 그 모순을 지적할 언론이 없다. 해방탑 비문이 교과서와 충돌한다는 사실을 보도할 기자가 없다. 김주애가 화면 중앙에 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질 야당이 없다. 노동신문이 내보내는 이미지는 반박되지 않은 채 유통된다.
한국 대통령의 공식 사진도 연출된다. 그러나 같은 행사를 취재한 다른 기자들의 사진이 동시에 나간다. 야당과 비판 세력은 그 사진의 허점을 지적하거나 비판적 해석을 붙인다. 같은 이미지를 두고 전혀 다른 맥락이 경쟁한다. 연출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해체하는 힘도 동시에 존재한다. 북한에는 그 해체의 힘이 없다. 그것이 결정적 차이다.
이것이 북한 이미지 정치의 첫 번째 조건이다.
●저널리즘의 부재
저널리즘은 권력의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 놓인 필터다. 발표된 것과 실제로 일어난 것 사이의 간극을 묻고, 연출된 장면과 현장 사이의 거리를 측정한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물음 자체가 이미지를 검증 가능한 주장으로 만드는 압력이 된다.
북한에 그 필터가 없다. 조명을 들고 탄광에 들어간 사진기자가 밝은 사진을 찍어 나와도 이의를 제기할 편집장이 없고, 그 결과물을 비판할 경쟁 매체가 없다. 이것은 북한 사진기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저널리즘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이미지는 현실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도구가 된다. 찍힌 것이 존재하는 것이고, 찍히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것이 북한 이미지 정치의 두 번째 조건이다.
● 이미지가 현실이 되는 순간
카운터 프레임도 없고 저널리즘도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미지가 현실 그 자체가 된다. 북한 인민에게 노동신문 사진은 세계를 보는 거의 유일한 창이다. 외부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노동신문이 보여주는 것이 현실이 된다. 탄광이 밝고 활기찬 사진을 보는 인민에게 탄광은 밝고 활기찬 곳이다. 김주애가 당·군 간부들보다 앞에 서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김주애는 자연스럽게 다음 지도자 자리에 있는 인물이 된다. 설명이 필요 없다. 이미지가 스스로 현실을 구성한다.
이것은 선전(propaganda)의 개념을 넘어선다. 선전은 거짓을 참인 것처럼 믿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카운터 프레임이 없고 저널리즘이 없는 사회에서 이미지는 참과 거짓의 구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비교할 다른 이미지가 없으면 검증도 불가능하다. 노동신문의 탄광 사진이 연출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그냥 현실이다.
●실험실로서의 북한
W.J.T. 미첼은 1992년 '픽토리얼 턴(pictorial turn)'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The Pictorial Turn," ArtForum, March 1992; 이후 Picture Theor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에 수록). 인류의 인식이 텍스트 중심에서 이미지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그런데 미첼이 관찰한 그 전환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실천하고 있는 사회가 역설적으로 북한이다.
모든 권력은 이미지를 통제하고 싶어한다. 자유 언론·독립 사법부·야당이 있는 사회에서는 그 욕망이 여러 겹의 필터를 통과하면서 다듬어진다. 북한에는 그 필터들이 없다. 그래서 권력의 이미지 욕망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드러난다. 연출이 걸러지지 않고, 모순이 지적되지 않으며, 반박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미지 정치의 원형이 관찰되는 곳이다. 일종의 실험실이다.
북한은 현대 시각 문화의 예외가 아니다. 그것의 극단적 사례다. 3대에 걸쳐 국가의 모든 장치가 단 한 사람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통제하는 데 헌신되어온 체제다. 이미지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한 길만 파온 그 끝에 북한이 있다. Nicholas Mirzoeff가 말했듯 "문화는 정치다(culture is politics)"(An Introduction to Visual Culture, Routledge, 1999, p. 248). 북한은 그 명제가 가장 순수하게 실현된 사회다.
실험실이라는 말이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 실험실 안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미지 정치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려는 사람에게 북한은 다른 어떤 사회도 제공하지 못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역설적으로 북한 이미지를 읽는 법을 익히면, 필터가 있는 사회의 이미지도 더 잘 읽게 된다. 탄광을 밝게 찍고 싶은 욕망, 후계자를 화면 중앙에 놓고 싶은 욕망, 대등한 프레임을 만들고 싶은 욕망 — 이것들은 어느 사회의 권력에서나 작동한다. 북한은 그것이 걸러지지 않고 날것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그래서 북한 이미지를 분석하는 일은 북한만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사진기자가 북한을 보는 이유
이 리포트를 1년 반 동안 써온 것은 그 때문이다. 노동신문의 탄광 사진에서 조명의 이유를 읽고, 해방탑 앞의 연분홍 정장에서 새로운 주인공이 배치된 의도를 읽고, 북미 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등장한 엠블럼에서 없던 문화를 만들어내는 속도를 읽는 것. 이 작업의 목적은 북한의 비밀을 풀거나 북한을 단죄하는 데 있지 않다.
사진기자는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안다. 무엇이 프레임 안에 들어오고 무엇이 밖에 남겨지는지를, 조명이 왜 사용되는지 그리고 무엇을 드러냄으로써 무엇을 지우려하는지 안다. 이미지가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사회에서 이미지를 포착하고 정리하던 시선으로 북한 이미지를 들여다보면, 카운터 프레임이 없는 사회에서 이미지가 어떤 힘을 갖는지가 보인다.
북한이라는 실험실은 문이 닫혀 있다. 그러나 이미지는 매일 밖으로 나온다. 그것을 읽는 것이 이 리포트의 일이다.
변영욱/ 동아일보 사진부 부장

사진 설명
북한이 5000톤급 신형 구축함의 두 번째 함인 '강건'호의 취역식을 개최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2026년 9월 7일 밝혔다. 구축함 위에서 김정은이 그의 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주애의 이름은 아직 북한 내부에서는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노동신문=뉴스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