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박오학전 동아일보 전무
내가 동아미디어그룹과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에서 일하는 동안 화정 선생이 추진했던 사업을 생각해 보니 ‘준비된, 과감한 결단’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번 추모집 발간을 앞두고 당시를 곰곰이 회상해 보니 각 분야마다 화정 선생의 과감한 결단이 미디어그룹 발전을 이끌었다는 점이 너무나 뚜렷했다. 화정 선생이 앞장선 일은 동아의 미래가 걸린 핵심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중요한 사안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모든 성과가 발현되고 있는 요즘, 다시 돌이켜보니 미래를 예견한 화정 선생의 판단과 결단이 새삼 존경스럽고, 그립다.우선, 관행을 타파하고 굳건한 역사의식이 발휘된 일부터 떠오른다. 바로 경기 안산에 공장을 건립하는 사업이었다. 안산공장은 화정선생이 직접 설립을 관장한 프로젝트였다. 핵심 사안은 당연히 윤전기였다. 화정 선생은 이전까지 쓰던 일본제를 버리고 독일제를 구매하기로 결정하셨다. 한국에서 대형 인쇄기는 일본제를 쓰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 하지만 화정 선생은 “이제 일본을 이겨야 하지 않겠나”라는 말씀을 하셨다. 독일제 ‘게바우’라는 이름의 윤전기 구입을 결정하게 된 단초였다.
신문의 미래에 중요한 결정이라고 판단한 화정 선생은 발송팀은 물론이고 인쇄와 전기 담당 직원까지 10여 명으로 팀을 꾸려 1996년독일 현지로 날아갔다. 몇몇 간부의 판단뿐 아니라 현장 직원의 판단도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독일 현지에서도 직원들과 거리감 없이 대화하고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셨는데, 아마 그런 분위기가 직원들로 하여금 새 윤전기의 면면을 소신껏 살펴보게 하는 원동력이 됐던 것 같다. 이때 독일 특파원이었던 김창희 기자도 당시 윤전기 구매 업무를 적극 지원해 화정 선생으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화정 선생이 독일제 윤전기로 결단하는 데 있어 그 뒤에는 준비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전남일보 이정일 회장의 자세한 설명과 추천이 있었다고 들었다. 당시 호남지역 동아일보는 전남일보가 대신 인쇄해 주고 있었다. 전남일보에서 독일제 인쇄기를 사용해 동아일보를 인쇄해 보니 품질도 좋고 업무 효율이 개선됐다고 해서 화정 선생이 면밀하게 검토하고 빠르게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지역 네트워크 협력 강화를 중시했고 원활하게 소통한 덕분에 화정선생이 그런 조언을 들어가며 훌륭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 본다.
화정 선생은 문화 창달에도 관심이 컸다. 조상현 명창을 불러 동아일보 주최로 ‘명인 명창 대회’를 열었는데 화정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심사료를 3배 이상 크게 올리고 대회 규모를 키웠다. 화정 선생이 지방 판매 조직 행사를 열 때는 항상 이 대회에 참가한 명창을 초대해 무대를 마련해 줬다. 지방 판매 직원들 앞에서 화정 선생이 직접 국악을 한 가락 뽑는 일이 흔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직원들은 손뼉을 치며 반가워했고 화정 선생은 그렇게 직원들과 소통하는 순간을 좋아했다. 조 명창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악단을 만드는 데 화정 선생이 큰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다.
소련과 한국이 수교하기 전, 화정 선생은 조상현 안숙선 명창을앞세운 대규모 국악단을 편성해 12일 동안 모스크바와 타슈켄트 등중앙아시아 9개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열었다. 공연 장비와 악기까지 모두 한국에서 공수하느라 엄청난 공력을 들여야 했다. 공식 수교를 앞두고 문화를 앞세운 민간 교류를 제대로 선보인 셈이었다. 또 동아일보의 역량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취재 역량을 키운다는 포석까지 엿볼 수 있었다.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감동적으로 우승한 이후동아마라톤대회를 국내 최초의 국제 마라톤 대회로 격상시키자는 의견도 화정 선생이 내놓은 것이다. 당시 한국 마라톤 대회에선 외국 유명 선수를 초청해본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동아가 개척한다”고 강조한 화정 선생의 의지는 남들이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머뭇거림 없이 내달릴 수 있게 했다.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한 화정 선생의 노력은 국악, 마라톤 뿐 아니라 음악콩쿠르에서도 발현됐다.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후원을 이끌어내 동아음악콩쿠르를 국제 음악콩쿠르로 발전시켰다.
교육 사업에서도 화정 선생의 결단력을 여러 차례 목도할 수 있었다. 학교에는 월 1회 정도 찾아와 업무 보고를 받으셨지만 학교 운영은 철저하게 재단과 총장에게 맡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학교의 미래가 달린 일에는 스스로 집중하고 결정하는 모습이었다. 고려대 운동장 지하 개발 사업이 그 대표적인 예다. 주차장을 지하로 넣어 공간을 확보하고 학생들에게 필요했던 독서실을 확충하려는 복안이었다. 이때 200억 원이 필요했는데 학교 재원을 쓰지 않고 법인에서 투자하도록 했다.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도 대기업의 장학사업 사회공헌 차원에서 삼성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건립했다. 이 역시 화정 선생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고려대의료원 전산화 사업도 빼놓을 수 없다. 100억 원이나 되는 거액을 투자했는데 이 또한 그때 준비해야 병원의 미래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진찰만 잘하면 되는데’라며 반대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화정 선생은 “환자 관리가 첨단화되지 않고선 최고의 병원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진해부원장에게 전적인 신뢰를 보내면서 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했다. 이 무렵 동아일보 제작 시스템의 전산화 과정이 있었는데 고려대의료원과 동아일보 모두 삼성SDS의 역량이 투입됐다. 최고의 신문, 최고의 병원은 최고의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결단도 기억이 난다. 전두환 집권 직후 어느 권력 실세가 현재의 신문박물관과 광화문우체국을 헐고 새 건물을 지은 뒤 3개 층만 우체국으로 내주고 나머지는 동아가 가져가라는 제안을 해왔다. 일민 선생은 물론이고 화정 선생도 이런 제안은 옳지 않다고 보고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으로 안다. 그 대신 화정 선생은 우리 힘으로 새 사옥을 짓기로 결정하고 이를 추진했다. 과시가 아니라 동아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핵심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회사 구성원들과 소통으로 설파했고 빠르게 추진한 것이다.
결단력 있는 모습은 직원을 아끼는 평소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화정은 직원들을 아끼는 마음이 남달랐다. 동아일보에 노조가 생겨 초대 위원장에 김종완 기자가 뽑혔다. 당시 내가 사측 대표였는데 한번은 화정 선생이 “이번 협상 테이블에는 내가 사측 대표로 나가고 싶다”고 해서 김 위원장과 화정 선생이 테이블에 앉게 됐다. 화정 선생은 노조의 별다른 요구가 없었는데도 누진제 퇴직금을 대폭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재무과는 물론이고 우리의 노사 협상을 지켜보던 다른 언론사에서까지 볼멘소리를 냈다. “동아만 이렇게 크게 올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하소연이었다. 혹시나 근무시간을 늘리거나 하는 반대급부가 있지 않나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최고의 동아일보에 다니는 최고의 직원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말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이처럼 최고의 대우 외에도 직원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소통하려 애쓰시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특히 광고 업무에서는 ‘우리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단 한순간도 잊지 말라고 자주 당부하셨다. 1980년대 말 서울 강남이 고급 주거지로 떠올랐을 때 공격적으로 대대적인 마케팅을 해야 한다며 화정 선생이 연일 진두지휘하시기도 했다.말을 앞세우지 않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이 먼저 앞장서니 직원들이 크게 믿고 따르며 더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나섰던 모습이 생생하다.
‘가장 뛰어난 인재로 키워 최고의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가 화정 선생의 모든 것을 좌우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당시로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과감한 결단을 내리게 했고 남들이 따라오지못하는 동아만의 특색 있는 사업을 탄생시킨 셈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