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14대 심수관재일 도예가
근 20년 전 일이지만 그 전시회를 떠올리면 지금도 짜릿한 성취감과 함께 등골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1998년 동아일보 일민미술관에서 열렸던 ‘400년 만의 귀향-일본 속에 꽃피운 심수관가(家) 도예전’의 기억입니다.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이나 큰일을 해냈다는 기쁨이 대단했지만 행사 전에는 몇 달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걱정이 많았습니다.‘400년 만의 귀향’이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심수관가 선조들이대대로 만든 도자기들이 이곳 가고시마현 미야마(美山)를 벗어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도자기란 자칫 깨지면 끝장나는 물건입니다. 내진 설계된 수장고에서 오롯이 보존돼 온 도예품 140여 점을 한꺼번에 밖으로 옮긴다는 것은 저로서는 엄청난 모험이었습니다.
한국 전시 계획이 알려지자 지역 언론들도 엄청나게 반대했습니다. 조선에서 건너온 도공들이 이곳 사쓰마(薩摩·현재의 가고시마현)에서 꽃피운 ‘사쓰마야키(薩摩燒)’는 일본 도자기의 대표적인 명칭이 돼 있습니다. 수장고의 140여 점은 사쓰마야키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일본 내 유일한 컬렉션입니다. 사쓰마야키의 역사는 곧 일본 도자기의 역사인데 자칫 사고라도 나면 그것이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우려였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한구석에는 선조들이 빚어낸 이 도자기들에도 혼(魂)이 깃들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한 번쯤 고향에 가보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늘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사실 수장고를 만드는 것은 제 아버지 13대 심수관의 염원이었습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아버지가 당대에 이루지 못했던 일을 제가1980년에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30개의 철근을 박아 어떤 지진이 와도 흔들리지 않도록 설계했습니다. 큰돈이 들었지만 이곳을 짓는 분이 “혹 큰 지진이 오더라도 이곳으로 피하면 안전하다”고 말해줄 정도였습니다. 그 후로 문외불출(門外不出) 원칙을 지켜왔고 “누구라도 보고 싶으면 미야마까지 오시라”는 자세였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전시회는 1964년 세상을 뜬 아버지의 유언을실현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유언은 “1998년이 일본에 온 지 400주년 되는 해다. 그때를 잘 부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 30여 년간 저는 사쓰마야키 전래 400년 기념제를 어떻게 성공시킬 것인가 궁리하며 보냈습니다.
그중 하나가 ‘조선의 불씨’를 이곳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초창기 조상들이 조선의 흙과 기술로 일본의 불만 빌려 빚은 그릇을 ‘히바카리’(‘오직 불만’이란 뜻)라 불렀던 것을 생각하며 이번엔 한국의 불을 가져와 일본의 흙과 기술로 도기를 빚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꿈은 결국 1998년 전북 남원에서 채취한 불씨를 미야마에 가져옴으로써 이뤄졌습니다. 불씨는 지금도 미야마도유칸(美山陶遊館)의 가마 곁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고향 귀국 전이었습니다. 도자기에 깃든 조상의 영혼들이 400년 전 끌려온 뒤 돌아가 보지 못한 조선의 산하에 인사를 할 수 있다면 기뻐하실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해마음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고민을 해결해 주신 분이 화정 선생이었습니다. 화정 선생과의 인연은 이대순 전 체신부 장관의 소개로 이뤄졌습니다. 이대순 전 장관은 1993년 이곳을 방문하신 뒤 친분을 쌓아온 사이였습니다.그 무렵부터 저는 아버지의 유언과 400년제의 꿈을 그분에게 넌지시 털어놓았습니다.
전시회 1년 전 쯤이었을까, 이대순 전 장관과 함께 김병관 회장을 찾아간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러자 김병관 회장은 흔쾌히 “그럼 우리 미술관에서 합시다”라고 하셨습니다. 서울 광화문의 일민미술관을 말씀하신 겁니다. 당시 일민미술관은 전시 일정을 변경하면서까지 전시회장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뒤로는 도자기들의 포장과 운반 등등에 대한 걱정으로 매일 밤잠을 설치는 일이 이어졌습니다만.
일민미술관에서의 전시회(1998년 7월 7일~8월 16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개관 당일 김대중 대통령이 전시장에 나타났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전시회는 당초 예정했던 일정보다 기간을 연장했고 전시를 보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룰 정도로 성황이었습니다. 당시 사진들이 저희 집에 앨범으로 정리돼 남아 있습니다. 김영삼 전두환 노태우 등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일민미술관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정치적 입장이 전혀 다른 분들이었다는데, 동아일보사가 초대장을 보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김병관 회장은 편안하면서도 품격이 있고 늠름한 기상이 풍기는 분이셨습니다. 1998년 지인들과 함께 부부 동반으로 이곳 제 집까지 찾아와 주시기도 했습니다. 김병관 회장께 제 작품을 하나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그 뒤 동아일보를 방문했을 때 사무실에 그 도자기가 여있는 걸 보고, 솔직히 감동했습니다. “이분은 선물을 사유화하지 않고 회사의 자산으로 여기는 분이구나.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놓아주셨구나” 하는 생각에 말이죠.
돌이켜보면 동아일보는 다른 어느 언론보다 저를 소중히 여겨 주시고 대접해 주셨습니다. 그 감사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뒤로 서울에 가면 항상 동아일보에 들러 인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저로서는 고국에 인사를 드리고 싶어도 따로 연락할 곳이 마땅치 않은지라 동아일보에 대신 인사를 올리는 것 같은 기분으로 찾아가곤 했습니다. 여기 더해 제 한국 친구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동아일보는 자부심을 가지고 정론을 펴는 한국 최고의 민족지라고요.
고향을 떠난 지 4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고향이 그립습니다. 대대로 선대로부터 고국에 대한 자부심과 집안에 대한 긍지를 물려받으며 자랐기 때문일 겁니다. 아니면 저희 집안 이야기를 ‘고향을 어찌 잊으리’라는 소설로 써주신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선생도 말씀하셨듯이 이곳 미야마의 토지가 저의 선조가 끌려오기 전 살았던 남원 땅의 풍경과 닮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를 저는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1965년11월, 배로 건너가 부산 대구 대전 등에서 1박씩 하며 서울로 향했습니다. 저녁마다 허름한 대폿집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저의 사연을 들으면 “400년 만에 돌아왔다니, 불쌍해서 어쩌나. … 환영한다”며 술잔을 권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본 한강.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한강은 세상에서 장 크고 아름다운 강이라고 듣고 자랐습니다. 처음 봤어도 기억 어느 구석에 본 적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2013년 2월 방문 이래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흔을 넘기다 보니 객지에서 갑자기 어찌 될지 몰라 발걸음을 삼가게 됩니다. 실은 1995년 이한기 전 국무총리가 가고시마의 저희 집에 체류하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뜨셨습니다. 잠시 다니러 간 이부스키 온천에서 불귀의 객이 되셨는데, 그 이후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은 행동을 삼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이제 한국도 하늘이 높아졌으려나, 지금쯤 한강은 얼었으려나…. 그리고 나이 탓에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지금도 ‘최후의 여행’을 꿈꿉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기사가 모는 택시를 하나 빌려 전국 곳곳을 돌며 고향 산하에 이별을 고하고 싶다고…. 그때 다시 한번 동아일보에도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할 텐데요.늘 생각하지만 마음뿐입니다. 동아일보의 무궁한 발전과 김병관 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