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염재호고려대 총장
화정 김병관 이사장님이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신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고려대 개교 100주년 사업을 한창 준비할 때 나는 기획예산처장으로 화정 선생님을 자주 뵐 기회가 있었다. 다소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모습으로 알고 있지만 화정 선생님만큼 가슴 따뜻하게 우리를 대해 주시고, 고려대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분은 찾아보기 어렵다.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평판을 의식하지 않으시고 진솔한 모습으로 학교를 그토록 사랑하셨던 추억이 더욱 새롭다.내가 화정 선생님을 가깝게 만나 뵐 수 있었던 것은 2002년 무렵이었다. 화정은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이었고 나는 고려대 교수협의회 총무였다. 당시 총장 선임 과정에서 그 절차를 놓고 재단과교수들 사이에 갈등이 일었다. 재단에서는 총장 임명은 재단의 권한이라고 생각했고, 교수들은 기존의 절차를 존중해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법인, 대학, 교우회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지금의 총장 간선제 룰을 만들었다. 그 후 많은 대학들이 벤치마킹을 할 정도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총장 선출제로 평가되었다. 화정은 당시 나를 비롯한 교수협의회 사람들을 ‘혁명군’이라고 놀리기도 했지만, 우리의 행동이 학교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그 후 잘 알게 되신 듯했다.
화정은 합리적이고 원칙을 지키는 분이셨다. 동아일보가 김대중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군사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에 앞장서 온 동아일보가 왜 호남 출신 대통령과 진보 정부에 비판적이냐고 궁금해서 여쭈어 보았다. 화정은 거침없이 “언론의 사명은 어느 정권이건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에 있다”라고 하셨다. 정권이 보수이건 진보이건동아일보가 언론 본연의 자세에 충실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가득 찬 말이었다. 화정의 자긍심과 용기를 깊이 느낄 수 있는 대화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화정은 진정 학교를 사랑하는 분이었다. 학교 구성원을 정말 좋아하셨고,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도 학교를 위해 헌신하셨다. 그래서 누가 당신만큼 학교를 사랑하고 학교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지 예리하게 살펴보셨다. ‘혁명군’이란 표현에서처럼 간혹 겉으로는 거칠게 표현하신 적도 있지만 그건 사실 학교 구성원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안문석 교무부총장님은 지금도 화정 선생의 인격을 높이 평가한다. 부총장 4년 임기 중 단 한 번도 학교 행정에 대해 지시하거나 부탁하는 전화 한 통이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립대학 재단이 학교 행정에 깊이 간여하는 것으로 볼 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사장으로서 화정은 오로지 학교 발전을 위해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하나 하는 걱정이 더 많으셨던 분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인촌가문의 자부심이고 집안의 내력이었던 것 같다. 고려대로서는 커다란 복이 아닐 수 없었다.
화정은 경제적인 문제처럼 어려운 일은 당신이 어떻게든 해결할테니 학교 구성원은 재정 걱정을 하지 않도록 격려해 주셨다. 그 대신 학교는 글로벌 대학으로 도약했으면, 사립학교 가운데 단연 1등이었으면 하는 야심을 갖고 계셨다. 더타임스가 발표한 ‘2005년 세계 200대 대학’ 순위에서 고려대가 처음 184위에 올랐다. 동시에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생명공학 등 5개 학문 분야로 나뉜 세부 조사에서도 고려대가 인문과학 분야 89위, 사회과학 분야 66위에 오르자 화정은 정말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셨다.
화정의 학교 사랑은 캠퍼스 인프라 투자에서 잘 배어난다. 특히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2002년 완공된 중앙광장은 화정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중앙광장은 화정의 비전이 그대로 담겨 있는 곳이다. 자동차를 모두 지하에 주차하게 만든 ‘차 없는 캠퍼스’를 구현해 대학 캠퍼스 디자인에 새로운 흐름을 선도하면서 그 후 이화여대 등 다른 대학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중앙광장의 열린 공간적 이미지, 정문에서 봤을 때 가로로 확 트인 공간은 나라와 민족을 끌어안는 고려대의 열린 이미지, 사람을 좋아하는 화정의 애민(愛民)정신과도 잘 부합한다. 학교 정면에 대운동장을 두는 일본식 학교 공간 배치를 청산하고 중앙광장 지하공간을 21세기 정보화 네트워크의중심센터로 활용했다는 의미도 매우 크다. 일본이 대동아 공영의 구호 아래 한국을 식민 통치하기 위해 주민을 모아놓고 군사훈련을 시키거나 놋그릇을 공출시키는 장소로 학교 운동장을 활용했는데 한국과 일본에만 있는 학교 중앙운동장이 고려대 캠퍼스에서부터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후 약 5년간 △100주년 기념 삼성관 △화정체육관 △LG-포스코 경영관 △하나스퀘어 △녹지운동장 △창의관 △법학도서관 등이들어섰다. 2006년 고려중앙학원에서 262억 원의 공사비 전액을 부담해 완공한 화정체육관은 국내 대학 스포츠 시설 중 최대 규모로, 체육행사와 문화 행사를 모두 할 수 있다. 학생들과 교직원은 피트니스센터와 스쿼시 코트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일반 열람실과 멀티미디어 열람실, 정보검색실, 박물관, 삼성 글로벌 라운지 등을 갖춘 100주년 기념 삼성관도 화정의 노력으로 건립된 것이다.
고려대 의대 연구실도 전에는 상당히 열악했다. 화정은 당시 관례였던 리베이트를 개선하고 의료원의 약품 도매 구입을 전담하는 수창을 설립했다. 그 수익금 등으로 의대 교수 연구실을 새롭게 확충한 초현대식 화정의학연구동을 설립했고, 의료원 전자 시스템인EMR를 구축하는 데 지원했다. 화정이 2001년 고려사이버대를 설립한 것도 고려중앙학원의 설립 정신과 교육 이념을 앞서가는 사이버공간에서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미래 온라인 교육을 선도하기 위해사이버대 최초 온라인대학 학술포럼을 개최하고, 한국마이크로소프트의 컨설팅을 받아 사이버대 최초로 차세대 교육 정보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 미국 연구기관 RCI와 케어기빙 전문교육 과정을 개발하는 등 국내 최초의 사이버대라는 자부심을 보여주는 사례는 하나 둘이 아니다.
2002년 총장 선임 문제로 힘들었던 시절, 화정과 처음 만나 얘기하고 술을 함께 마시며 고려대의 발전에 대한 진솔한 고민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멀리서만 알던 화정 선생님을 가깝게 뵈면서 화정의 진심과 열정을 알게 되고 많은 지혜를 배울 수 있었기때문이다. 화정은 1999년 3월 5일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취임사에서 밝혔듯이 ‘역사의 고비마다 진리와 정의의 편에 서서 용감히 발언하고 행동해온 교육 구국의 이념’을 참으로 자랑스러워 하셨다. 그것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학교를 지키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새삼 화정 선생님이 그립다. 삼가 명복을 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