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오쿠시마 다카야스 奧島孝康전 와세다대 총장
김병관 선생은 김성수 선생의 손자로, 김상만 선생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김성수 선생과 김상만 선생은 두 분 모두 와세다대 졸업생입니다. 저는 와세다대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모아 ‘도몬의 군상(稻門の群像·와세다대 출판부·1992년)’을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두 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소개했습니다.한국의 저널리즘을 대표하는 동아일보는 김성수 선생에 의해1920년 4월 1일,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을 자임하는’ 한국어 신문으로서 창간됐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 통치하에 있었으나 일관되게 민족주의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을 표명해 1940년 8월 폐간될 때까지 4번이나 정간 처분되는 탄압을 받았습니다. 1945년 12월에 복간해 야당계 신문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강권정치를 비판하고 박정희정권하에서의 언론탄압에도 저항하는 등 언론의 자유를 지켰습니다.
이 반골정신으로 가득한 신문의 창립자는 1914년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1920년에는 ‘동아일보’, 1933년에는 고려대의 전신을 창설하는 등 경제계는 물론이고 정계에서도 활약했습니다. 세상을 떴을 때는 와세다대 창립자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마찬가지로 ‘국민장’이 거행됐을 정도로 국민적 존경을 받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김상만 선생은 1940년에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동아일보 사장으로 오랜 기간 활동했습니다. 특히 영국 정부로부터 명예기사 작위를 받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와세다대 한국동창회의 제3대 회장으로서 활약하셨습니다. 1982년 와세다대 100주년 기념행사 때에는 신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복제품을 기증해주셨습니다. 그 종은 지금도 와세다대 본교 오쿠마 정원 한 모퉁이에 한일 간 우정의 상징으로 모든 학생이 바라볼 수 있게 전시돼 있습니다. 1985년 와세다대는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해 그 공적을 기렸습니다. 저 개인도 아사히신문사 사외감사로서 누차 동아일보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김병관 선생은 와세다대와의 굵직한 인연을 이어받았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제가 총장을 맡았던 8년 동안 고려대와 와세다대 두 대학의 유대를 더욱 긴밀하게 발전시켰습니다. 두 대학 간 학술 교류의 중심을 교원 교류에서 학생 교류로 옮기고 교류의 내용을 더욱 실질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교류는 두 대학간 뿐 아니라 두 대학 출신 교우의 교류로도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총장 시절 국제 교류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만, 그 중심은 와세다대와 아시아 각국 대학생의 교류였습니다. 그에 따라 고려대와 와세다대 사이에도 그간의 학술 교류에 스포츠가 더해졌고 양교 졸업생 조직인 교우회 교류도 왕성해졌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였습니다. 서울에서 개최된 대학생 프레월드컵의 한일 양국 대표 경기를 관람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밤 축하연에서 김병관 선생과 가라오케 반주로 노래를 하며 한껏 즐거워했던 추억도 있습니다. 이 무렵부터 양교의 스포츠 교류는 활발해졌습니다.
또 이를 계기로 양국 대학생의 공동 자원봉사 활동도 시작됐습니다. 저는 총장 임기가 끝난 뒤 와세다대 아시아연구기구의 대표로 취임해 이 같은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06년에 각서를 조인하고2009년부터 시작된 고려대 와세다대 대학생 성신(誠信)학생교류는 벌써 10년 가까이 공동 세미나나 스터디 투어 등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제가 보이스카우트 일본연맹 이사장으로서 거행한 한일 청소년교류 캠프도 이미 10년을 넘었습니다. 2015년 8월 일본의 야마구치(山口)현에서 개최한 제23회 보이스카우트 세계 잼버리(3만5000명참가)에서는 행사 기간의 절반인 6일간에 걸쳐 매일 4000명(총 2만4000명)을 히로시마(廣島)시에서 개최된 평화기념식 및 원폭 피해자위령제 행사에 보냈습니다. 규슈의 쓰시마를 중심으로 해 고려대와 와세다대가 주도하는 한일 대학생 청소 활동과 환경 문제 연구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김병관 선생은 한일 양국, 고려대와 와세다대 양교의 교류에 엄청난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그 공적을 기려 저는 총장으로서 2001년 4월 1일 입학식 행사에서 선생께 명예박사 학위를 드렸습니다. 당시 그 공적문은 저 자신이 작성한 것이어서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한국 언론계의 중진으로서 남북문제 해결에 매진하고 나아가 국제 평화를 위한 정력적인 활동을 하셨을 뿐 아니라 한일 양국의 우호관계 촉진에 다대한 공헌을 하신 공적, 그리고 와세다대와 협정교인고려중앙학원의 이사장으로서 양 대학의 긴밀한 우호협력 관계의 촉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신 공적은 실로 현저하다.
이에 와세다대 총장, 이사, 평의원 및 교직원은 일치해 명예박사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할 것을 결의하였다. 학문의 전당에 영광 있으라! 대학이 영예를 부여하는 자를 찬양하라!(Vivat universitas!Laudate quem universitas honorabit!)”
이것은 와세다대로서는 최대의 경의 표시이자 최고의 찬사입니다.건학 이래 와세다대는 ‘증오는 미래의 문을 닫는다’라는 교시를 내걸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고려대와 와세다대의 우정은 영원할 것입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