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이용만전 재무부 장관
화정과 나는 고려대 교우(校友)이고 비슷한 연배다. 대학은 화정이 경제학과 54학번이고, 내가 행정학과 55학번으로 화정이 1년 선배다. 연치(年齒)는 화정이 1934년생이고 내가 1933년생으로 한 살 위지만 나는 늘 화정을 깍듯이 선배로 모셨다.화정은 조부인 인촌 김성수 선생과 고하 송진우 선생을 존경했고 가끔 두 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고려대 출신이어서 인촌 이야기가 나오면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나는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평강 출신이다. 나의 이름은 원래 용만(龍萬)이 아니라 승만(承萬)이었다. 그런데 공산치하에서 ‘이승만 김구 타도, 스탈린 원수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구호를 매일같이 외치는 통에 아버지가 이름을 용만으로 바꿔주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부농이었다. 그런데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주로 몰려 탄압을 받았다. 국군과 미군이 북한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학도대에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국군에 입대해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고 상이군인이 되었다. 부상당한 제대 군인으로 어렵게 고학을 하며 성균관대를 거쳐 편입해 들어간 대학이 고려대이다. 그래서 나의 고려대 사랑은 남달랐다.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인 이용익 씨가 작고한 뒤 천도교에서 학교 경영을 했으나 1930년경부터는 재정 형편이 어려웠다. 인촌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가장 절실한 과제라고 보고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며 세계 각국의 큰 대학을 두루 돌아보았다.
인촌이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을 인수할 때 자금은 양부 김기중,생부 김경중 두 분에게서 나왔다. 인촌이 중앙학교를 인수할 때도 양부와 생부가 거금을 내놓았다. 그때 인촌은 25세의 젊은 청년이었다.“경험도 부족하고 서울에 연줄도 없는 처지에 어떻게 큰돈을 들여 학교를 인수하느냐”고 생부와 양부가 반대하는 바람에 인촌이 사흘간의 단식투쟁을 해 두 분을 설득했다고 한다.
화정은 인촌의 좌우명인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민족자강(民族自强) 같은 글귀를 늘 마음에 새기면서 할아버지를 배우려고 노력했다. 화정도 인촌처럼 한번 뜻을 세우면 굽히지 않아 고집이 세다는 말도 들었다.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화정은 일본 여행 중에 동아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고하 송진우선생을 거론하며 “고하가 애국자이시고 거물이야”라고 말해 나도 고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나는 고하의 평전을 들춰 보다가 화정이 고하의 성품을 많이 닮았고 그의 가르침이 몸에 배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고하는 1925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만국기독청년회 주최로 2주간 열린 범태평양기독교 청년대회에 참석해 이승만을 비롯한 교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귀국 후 동아일보에 10회에 걸쳐 ‘세계 대세와 조선의 장래’라는 논설을 썼다. 고하는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그러므로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도저히 조선을 떠나서는 또한 조선을 잊어버리고는 일각이라도 설 수가 없고 살 수가 없다. 이리하여 자거나 깨거나 듣거나 보거나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이 현하 우리 동포의 심리적 상태인가 한다”라는 문장으로 논설을 시작했다. 고하의 애국 사상이 감도는 글이다.
고하는 1926년 3월 3·1운동 7주년에 소련의 국제농민회 본부가 조선 농민에게 보낸 메시지를 번역해 동아일보에 게재했다. 이 때문에 신문은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고 고하는 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됐다. 상고 기각으로 징역 6개월의 실형이 확정됐을 때 고하는 기자 단체인 무명회의 송영회(送迎會)를 받고 감옥에 들어갔다. 그는 옥중에서 인촌에게 “윤리학 동서철학사 서양역사 서양문명사 철학개론 등이 우리 집에 있으니 그 가운데 페이지 수효가 많은 놈으로 보내주시옵소서”라고 서한을 보냈다.
김대중 정부에서 동아일보가 세무조사를 받고 화정이 수감됐을 때 지인들과 면회를 갔다. 화정은 “만사태평이다. 겪을 것은 겪고, 시키는 대로 담담하게 따르며 먹을 것은 잘 먹고 있다. 염려 말라. 좋은책이나 넣어 달라”고 말했다. 화정의 옥중 생활하는 모습이 어쩌면 고하와 똑같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정은 가까운 사람이 기사를 부탁해도 공사(公私)가 분명했다.누가 “기사를 빼달라”고 부탁하면 편집국에 알아본 뒤 올바른 기사일 경우 부탁을 거절했다. 화정과 식사를 하다 어떤 기사나 사설 칼럼이 좋더라고 하면 화정은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했다. 어떤 때는 그 기사나 칼럼을 쓴 기자나 논설위원을 불러내 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기도 했다.
주변 사람을 두루 챙기는 것은 선대인 일민(一民) 김상만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일민은 동아일보와 고려대 출신 공직자들에게 1년에 한두 차례 만찬을 베풀었다. 나도 공직 시절에 매번 초대를 받았다. 술은 일민이 영국 유학 시절부터 즐겨 마신 버번, 잭 다니엘을 들고 나왔다. 비싸지 않은 술이었지만 정성이 담겨 있었다.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광복 후에도 유신시대의 백지광고, DJ 정부의 세무조사 등 고난을 많이 겪었다. 화정은 권력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뚝심으로 버텼다. 화정은 달변은 아니지만 한마디한마디가 여러 생각 끝에 나오는 함축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화정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 아쉽다. 화정은 나라를 사랑하고 정도를 지킨 언론계의 거목이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