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정몽준아산재단 이사장
김병관 회장님은 나의 중앙고등학교 선배다. 17년 선배이시니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까마득한 어른이다. 그래도 김 선배님은 늘 스스럼없이 나를 대해 주셨다. 소주 한잔하는 자리에도 자주 불러 주시고 이런 저런 세상 사는 지혜를 가르쳐 주셨다. 워낙 무뚝뚝한 분이라 살가운 표현은 없었지만 그분의 다감한 마음은 쉽게 느낄 수 있었다.김 선배님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뿐 아니라 선대로부터 이어졌다. 선친께서는 김 선배님의 부친인 김상만 회장님과 가까우셨다. 김상만 회장님이 선친보다 다섯 살 많으셨지만 두 분은 30대 때부터 친구처럼 지냈다. 김상만 회장님이 이끌던 동아일보와 고려대는 선친께서 고생하시던 젊은 시절 인생의 꿈을 꾸게 해준 곳이었다.
선친께서는 어린 시절이던 일제강점기, 강원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는데 동아일보를 통해 바깥세상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하셨다.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이광수의 ‘흙’을 읽고 허숭 변호사처럼 되고 싶어서 가출한 뒤 독학으로 변호사 시험을 보기도 하셨다. 그 뒤 서울에서 처음 막노동을 시작한 곳이 고려대 신축 공사장이었다. 선친께서는 유난히 아끼던 동생(정신영·작고)이 동아일보 기자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셨다. 그 동아일보의 김상만 회장님과 50년을 교유하셨으니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1977년 선친께서 현대건설 주식의 절반을 내놓고 아산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실 때 이사진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리신 분이 김상만회장님이시다. 김 회장님은 이때부터 1994년 돌아가실 때까지 아산재단 이사를 맡으셨다.
김병관 선배님은 김상만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그 자리를 이어 아산재단의 이사를 지내셨다. 그런 인연으로 나도 1999년부터 고려대재단의 이사 일을 하기도 했다.
김병관 선배님은 축구에도 관심이 많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대회 때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직접 경기장을 찾아오셨다. 마르세유에서 열린 우리나라와 네덜란드의 경기를 함께 보았던 기억이난다. 김 선배님은 1994년 조직된 2002월드컵유치위원회의 위원을 맡아 주시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월드컵을 유치하겠다고 하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코웃음을 치던 때다. 김 선배님은 선뜻 유치위원을 맡으면서 격려해 주셨다. 2002년 월드컵의 유치와 성공적 개최를 위해 동아일보가 지면과 각종 행사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김 선배님의 관심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김 선배님은 과묵하셨지만 그만큼 뚝심이 있었다. 언론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의식이 남다르셨다.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서 언론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김 선배님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권력의 압력에 맞섰다.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같은 중요한 사회적 의제에 대해 다른 언론사들이 머뭇거릴 때 동아일보가 용기 있게 할 말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김 선배님의 역할이 컸으리라고 짐작해 본다.
김 선배님이 유명을 달리하신 지 벌써 10년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와 언론 환경도 많이 변했다. 그래도 우리가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은 김 선배님이 품으셨던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이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소주 한잔하시고 거나해지면 부르시던 ‘흥타령’이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그분 얼굴을 떠올리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