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최맹호
최맹호전 동아일보 대표이사 부사장
말이 안 되는 비유 같지만 내가 본 회장님은 그러셨다. 무섭기도 했고 다정하시기도 했다. 돌아가신 뒤 김재호 사장의 답례 인사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화정 회장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병관 회장은 참 특이한 분이셨다. 남들이 못 하는 것을 하셨고 남들 다 하는 것은 못 하신 분”이라고. 그 이유를 여쭙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시시비비(是是非非) 불편부당(不偏不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화정 회장이 늘 강조하시던 단어였다. 2000년 11월 3일 임원회의 때.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가? 권력을 감시 견제 비판하는 것이다. 이는 국민에 대한 언론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과권력은 기본적으로 긴장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이 그날 하신 핵심 요지였다. 언론의 역할을 설명한 것은동아일보의 생명력을 다시 강조하신 것으로 이해했다.

2001년 김대중 정부 시절의 언론탄압 때였다. 세무조사 후 국세청의 고발로 검찰 조사를 앞둔 어느 날 오후 필자를 사무실로 불렀다. 회사의 분위기를 물어본 뒤 이렇게 말씀하셨다. “권력과 타협은 없다. 타협할 생각 없으니 나 모르게 그쪽과 대화할 생각 마라. 논조도 타협하지 마라. 사장에게 내 말을 분명히 전해라. 나는 죽어도 동아일보는 영원히 살아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것이 동아일보의 소명이자 의무이다.”

회장은 구속이라는 상황을 못내 싫어하셨지만 권력이 사주의 구속이라는 방향으로 몰아가는 형국이어서 무척 무겁게, 그러나 불가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모님이 돌아가신 지 열흘 정도여서 그 충격도 가시지 않은 때였다.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8월 11일 새벽 2시경, 변호사 사무실에서 기다리던 몇몇 간부에게도 “나는 조만간 구속될 거다. 구속되더라도 권력과 협상하지 마라. 나는 이미 회사를 떠난 사람이고 동아일보는 특정인의 신병을 빼주는 신문이 아니다. 행여 그럴 일 없겠지만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정도에서 벗어난 신문을 만드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셨다.

그 후 포장마차를 거쳐 동틀 무렵 청진동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하시면서 “아버지가 그러시던데 전쟁사를 쓴 어느 장군의 이야기라며 ‘뼈를 깎아 펜을 만들고 피를 잉크 삼아 책을 썼다’는 말씀이 생각나.창간 때부터 지금까지 동아일보의 역할이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눈물을 비치셨다.

시간을 돌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평양으로 출발하던 날이었다.

“오전에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 ‘평양에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시더군.”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잘 다녀오십시오’라고 했지. 분단 반세기 만에 만나는 남북한 간의 정상회담인데 좋기도 하고 걱정도 되네.”

“걱정하시는 게 뭡니까?”

“내가 북한을 가봐서 느끼는 게 있어.”

회장은 구체적인 설명은 안 하셨다. 그리고 남북 공동선언이 나온 다음 날 동아일보 사설은 선언 내용 중 통일 방안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실었다. ‘통일 방안은 우리 내부의 동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평양에서 이를 본 대통령이 언짢아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이 내용을 전해 드리자 화정은 “공동선언문의 통일 방안은 우리 사시와 안 맞잖아”라고 하셨다.

그 후 북한에서 김정일 위원장 명의로 남한의 언론사 사장단을 초청했다. 7월 중순 화정 회장은 오후 4시경 전화로 가회동 자택에서 7시에 실국장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동아일보 사장이 가야 하는지 의견을 나눠 보자는 말씀이었다.

“선약들이 있을 텐데요.”

“이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나.”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밤 9시까지 참석자들의 의견이 있었고 결론은 ‘동아일보 사장은 방북단에 참가하지 않는다’였다. 결론이 난 다음에야 화정은 “내가 북한을 다녀와 봐서 아는데 북한에 갈 경우 북한을 비판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소견을 말씀하셨다.

방북 불참을 동아일보 2면에 1단으로 보도한 다음 날 조선일보는 자신도 가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며칠 후 청와대 비서실장의 요청으로 점심을 하고 돌아오신 회장은 “언론사 사장 방북단에 동아일보가 빠진 것, 사설에서 대통령을 거론한 것 등으로 대통령이 격노했다고 하더라”며 지나가는 말처럼 전해주셨다.

그해 추석을 앞두고 북한이 칠보산 송이버섯을 명절 선물로 청와대에 보내왔다. 청와대는 이를 언론사에도 얼마간 보낸 모양이었다.타사에선 북한산 송이버섯 맛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우리 회사에선 아무 말이 없었다. 알고 보니 화정 회장의 지시로 반송했다는 이야기였다. 권력의 작은 정성도 뿌리친 회장님의 생각이 단호했음을 알았다.

후일 회장은 “언론사 세무조사를 이때부터 준비시킨 것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라고 하셨다. 세무조사는 김영삼 정부 때도 했지만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1999년에 세계일보와 중앙일보에 대한 세무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해 세계일보의 부회장, 사장, 주필을 쫓아내고 홍석현 중앙매스컴 대표를 구속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1월 11일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언론 개혁을 주문했다. 6일 후인 17일 MBC가 PD수첩을 통해 ‘족벌 언론, 언론 개혁’을 방영하고 1월 31일 국세청이 세무조사를 발표했다. 2월 6일에는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한다고 끼어들었다. 두 기관의 조사 와중에MBC는 PD수첩, 100분 토론, 미디어 비평, KBS는 심야토론, 취재파일 프로그램을 통해 줄기차게 보수 언론 중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3월에는 한겨레신문도 ‘심층 해부 언론 권력’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게재했다. 7월 들어서는 한겨레21, 시사저널등 주간지까지 가세했다. 권력이 사정기관과 친여 매체를 총동원한파상 공격이었다. 보수 언론의 사주와 신문사의 부도덕성을 강조해 언론 개혁의 정당성을 알리려고 기를 썼다. 회장은 “길은 정해져 있을거야”라며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악의적인 음해성 왜곡 보도에 대단히 우울해하셨다.

2001년 6월 29일 서울지방국세청 세무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은 정말 가관이었다. 권력의 포악성과 흉측함에 소름이 돋았다. 보수3개지에 대해서는 담당 국장이 돌아가면서 등장해 발표하고 추징 세액도 827억 원에서 864억 원으로 짜 맞춘 듯 비슷했다. 기자회견 총1시간 30분 중 3개 신문의 발표 시간만 40여 분이었다. KBS MBCSBS 등 지상파 3사는 이례적으로 생중계했다. 특히 동아 조선 중앙의 발표 내용을 생중계한 뒤 나머지는 양념으로 조금 방송하다 생방송을 중단했다. 권력은 특히 동아 조선 등 정권에 비판적인 2개 신문의 탈법과 부도덕성을 집중적으로 부각하고 이를 전 국민에게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발표 형식을 취했다. 그리고 검찰에 고발했다.

며칠 후 회장은 “권력과 언론의 전쟁이다. 우리도 손실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변호사들에게 모든 것을 알려줘라. 고발되지 않은 것까지도. 편집국장과 논설실장, 주필, 사장에게도 상황 설명을 해 제작에 흔들림 없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변호사 선임 건에 대해서는 단 한 말씀도 없으셨다. 전적으로 회사의 결정에 따르셨다.

검찰 조사가 한창이던 7월 14일 저녁 사모님이 돌아가셨다. 번개와 천둥이 하늘을 찢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이었다. 토요일 오후 당직근무 중이던 편집국 평기자들과 반주를 하고 들어가 쉬시던 회장은 자정 가까이 영안실에 갔다가 나오시면서 크게 부르짖었다.그 ‘노한 음성’은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다. 설상가상으로 초저녁부터 퍼붓던 폭우로 세종사거리와 청계광장 일대는 자정 경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바다가 됐다. 회사 건물도 지하 3, 4층이 침수되고 지하 4층에있던 배전실이 물에 잠기면서 건물 전체가 정전됐다. 중요한 제작 시스템이 멈춘 것이다. 화정 회장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와중에도 일요일 오후 전화로 “신문 만드는 데 괜찮냐?”며 걱정하셨다.

회사의 모든 직책을 던진 뒤 검찰 조사와 재판을 받으면서도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언론탄압과 정권의 부도덕성 등에 대해 “재판 중에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의지를 보이셨다. 1심 최후 진술에서 표현을 완화해 하고 싶은 말씀을 담았다.

“언론사 세무조사는 조세 정의의 구현이라는 미명으로 자행되고,적법한 권력 행사로 포장된 언론탄압이다. 언론을 길들여 무력화하고 장악해 도구 화하려는 불순한 동기에서 기획되고 추진된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대북 정책에서 지나친 양보나 무리한 발상 등 문제점을비판한 동아일보 때문에 이 정권의 정략적 구도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해 언론탄압을 시작했다”는 생각을 공개적이고 직설적으로 밝혔을 정도였다.

회장님의 결기는 1989년 2월 모스크바 방문 때도 보여주셨다. 당시 소련 문화부 초청 형식으로 방문 중이었다. 목적은 문화와 언론 교류. 볼쇼이 발레와 볼쇼이 오페라의 서울 공연을 유치하고 노보스티 및 APN 통신사와 동아일보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소련은 공산주의 체제였다. 되는 일이 없었다. 공산주의 사회의 특징인 이유와 핑계가 며칠째 이어지자 회장은 화가 나셨다. 수행하던 김정웅 문화사업국장을 먼저 심하게 질책하고 다음에 베스드노프 문화부 국장과 티흐미로바 과장, 계간지인 오고뇨크의 코로티치 주필 등 소련 측 사람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 될 일도 틀어질 상황이어서 조마조마해 참으시라고 했다가 나까지 혼나고 말았다. 옆에서 도와주던 고려인 교포 허진 씨와 이갠나지 씨에게도 화를 내셨다. 결국 볼쇼이 오페라 공연과 노보스티 통신과의 협력 관계를 만들어냈다. 회장은 일종의 심리전을 펴신 것이다. 모스크바를 떠나면서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아서 그랬다”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좀 심하셨던 건 사실이다.

2000년 10월 이른바 고려대 앞 사건의 파장이 일자 대표이사 회장직에서 물러나셨다. 11월 2일 열린 임원회의에서 “어느 누구도 동아일보의 신뢰를 훼손하는 일이 용납되어서는 안 되며 회장인 나도 예외일 수는 없다. 유감스러운 일로 회사에 누를 끼쳤기 때문에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으로 남겠다”며 20층 집무실을 떠나 일민미술관 2층으로 옮기셨다. 며칠 후 회사 임원을 지내셨던 원로 한 분이 “사주가 물러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재고를 요청했으나 회장은“내 언행이 회사 명예와 직결되는 사안”이라며 거절하셨다.

2001년 세무조사 후 검찰 조사가 본격화되자 “동아일보 명예회장 자격으로 검찰에 불려갈 수는 없다”며 이사직과 명예회장직도 퇴임하셨다. 7월 27일 임원회의에 보낸 인사말에서 “(세무조사, 공정위조사, 검찰 조사 등으로) 회사가 안팎으로 시련에 처한 상황에 법적도의적 책임을 통감하며 명예회장직을 물러납니다. 33년간 몸담았던 창업자의 3세로 온갖 영욕을 겪어 왔지만 지금처럼 회한에 빠지고 수모를 당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떠나지만 동아일보는 살아남아야 합니다. 동아일보는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의 보루이며 그 명운이 임직원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라며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회장은 그 같은 강단과 결기를 보이셨지만 내면적으로는 무척 여린 마음을 갖고 계셨다. 바깥에 일부 알려진 대로 거칠고 우악스러운 분이 아니었다. 일에 대한 고집과는 다른 차원이다. 경영전략실장 자리는 회사의 수석참모 자리다. 이 자리를 맡으면서 회장께 “참모로서가감 없이 말씀드릴 겁니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어 지시사항에 대해 재고, 고려, 심지어 반대 의견도 드리곤 했었다. 합리적인 대안을 드리면 늘 받아주셨다. 회사의 중요 업무에 대해서는 두세 명으로부터 의견을 듣곤 하신다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다. 어려운 결정일 경우 외부 인사들에게도 의견을 구해 판단하셨다. 한번은 신문박물관 건으로 의견을 말씀하시기에 다른 방안을 설명 드렸더니 언짢아하셨다. 점심하는 데 같이 가자는 말씀을 거절했을 정도로 나도 기분이 좀 그랬다. 그런데 그날 오후 늦게 전화를 걸어 “내가 다시 생각해 보니 최 실장 말이 맞아. 그대로 진행해”라고 말씀하셨다.

점심을 하시면서 다른 분들의 의견을 구하신 게 틀림없어 보였다.불편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인사 관리 시스템을 새로 정비하면서 ‘인사위원회’ 구성과 운영 방안을 보고드리자 “나한테서 인사권을 빼앗아 가는구먼” 하면서도 결재하셨다. 말씀을 듣고 보니 모골이 송연했다. 인사권에 관련된 의미는 6개월 동안 작업하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후한 번도 인사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퇴직금 누진제 폐지 협상을 할 때도 “우리 급여가 많은 것은 아닌데. 그래도 하긴 해야지”라며 안타까워하시면서도 누진제가 주는 경영 부담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셨다. 계약직 사원에 대한 보상이 적어 일반 사원들이 양보를 하고 그 금액만큼 회사가 별도 출연해 지원을 했다고 보고드리자 무척 반가워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해외여행에 수행할 때면 첫 말씀이 “관폐 끼치지 마라”였다. 대사관이나 KOTRA에 연락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심지어 특파원에게도 일에 지장을 주니 연락하지 말라고 하실 정도였다. 동유럽이 막 열렸을 때 숙식이나 교통편이 무척 불편하고 치안도 불안한 상황이었다. 현장을 보겠다는 회장을 모시면서 루마니아에서 안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대사관 협조를 받았다가 혼나기도 했다.

화정도 많은 고민을 안고 계신 걸 가끔 느꼈다. 2000년 8월 초순이었다. 저녁 자리가 끝나갈 무렵 나에게 “내가 공부를 안 해 미욱하지만 그래도 동아일보의 시설 현대화는 경쟁지 못지않게 마련했다. 거기에 신경 쓰느라 인재 육성과 인사 관리에 소홀했던 건 인정한다. 이제부터 콘텐츠는 임직원이 단합해 1등 품질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문하셨다.

고려중앙학원에 대해서도 “2005년이면 고려대 건학 100주년이고중앙고도 2002년부터 자립형 사립고로 전환하는데 시설 현대화, 교육 선진화와 글로벌화에 막대한 재원이 필요해 걱정이다”며 고민을 털어놓으셨다.

직원들의 사기와 사내 분위기에도 관심이 높았다. 편집국 기자들이나 업무 분야의 간부들과도 수시로 식사하면서 의견을 들으시곤 했다. 2000년 후반 회사 분위기가 어수선할 때 실국장 회의에 이례적으로 참석하셨다. “우리 신문은 비전과 방향이 제대로 설정되어 있나?말은 1등 신문, 최고 신문이라고 하지만 공염불이다. 제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의견이 갈리고, 그래서 무슨 신문을 어떻게 만드느냐”고 크게 질책하신 뒤 “사기 저하와 불신 분위기가 걱정스럽다”며 “인화 단결 협동정신으로 화합을 간곡히 당부한다”고 하셨다. 마음에 담고 계시던 내용이었다.

회사 간부로서 화정 회장에게 혼도 나고 야단과 꾸중도 많이 들었지만 따스한 정도 많이 받았다. 돌아가시기 전해인 2007년 12월 30일 일민미술관 사무실에서 점심으로 배달된 메밀국수 절반을 덜어 주시면서 종이에 “고생이 많았다”고 적으시고 나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며칠 후 병원으로 가셨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회장님은 나에게 마지막 작별을 하신 것 같았는데 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10년 전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기분 좋으실 때, 편안하실 때 입가에 번지던 회장님의 미소가 그립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