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하코시마 신이치 箱島信一전 아사히신문 사장
동아일보 김병관 명예회장이 세상을 뜬 것이 2008년 2월이니 어느새 10년이 훌쩍 지나가려 하고 있다. 처음 서울에서 만나 뵌 것은 1994년 4월로 당시 나는 아사히신문 편집국장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우호를 다져온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제휴 관계를 한층 강화하고 있었다. 그때 나의 방한은 카운터파트인 홍인근 편집국장과의 정보 교환과 의견 교환, 김영삼 대통령 인터뷰 등이 주목적이었다.당시 동아일보는 오랜 석간에서 조간으로 신문 발행 체제를 바꾼 직후여서 변혁 한가운데에 있었다. 홍 국장은 간이침대를 국장실에 가져다놓고 말 그대로 농성 체제로 진두지휘를 하는 등 사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넘쳤다. 그런 가운데 동아일보 신문 발행인이기도 했던 회장을 예방했는데, 그의 안색은 사내에 가득한 긴장감과는 사뭇 달리 시종 따뜻했다. 그 여유롭고 유연한 응대가 기억에 선명하다.
두 번째로 만나 뵌 것은 내가 아사히신문 사장이 된 이듬해인2000년 8월,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위해 서울을 방문했을 때다. 김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 총서기와 남북 정상회담을 한 지 2개월 뒤였다. 마침 다음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조선노동당 고급 간부가 서울을 방문 중인 시점이기도 했다. 대통령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해 노벨 평화상에 빛난 김대중 대통령의 결단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김병관 회장은 극히 회의적이었다.
그로부터 17년여.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는 최악의사태조차 배제할 수 없는 위기적 상황이다. 당시 창 밖으로 청와대가보이는 동아일보 본사 20층 응접실에서 들었던, 내게는 좀 의외로 느껴졌던 김 회장의 발언을 떠올려 보며 국제 정치의 격한 변화를 실감한다.
그날 밤 서울의 인촌고택에서 열린 환영연에 초대받았다.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 쌍방의 편집국 간부를 중심으로 20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석한 연회였다. 흥이 오르자 여기저기서 폭탄주 교류가 시작됐다. 회장과 나도 팔을 끼고 ‘원샷’을 하는 대오에 합류했다.
연회가 한창일 때 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순두부찌개가 테이블에운반돼 왔다. 내가 서울을 방문하면 반드시 찾는 대중음식점 ‘감촌’에서 일부러 배달시킨 거였다. 깜짝 놀라는 내게 “자, 드세요” 하면서 권하는 김병관 회장의 웃는 얼굴. 그때 일은 세심한 배려에 대한 감사와 함께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2008년 2월 고려대 체육관에서 열린 장례식에 나는 아사히신문을 대표해 참석했다. 넓은 행사장은 각계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권오기 전 사장이 장의위원장을 맡은 장례식에서 나는 조사(弔詞)를 읽었다. 당시 편집국 부국장이던 심규선 씨가 순차 통역을 해줬다. 나로서는 버거운 역할이었지만 가능한 한 회장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하고 싶었다.
도쿄를 출발하기 전, 한정된 시간이었지만 일찍이 회장을 가까이에서 접해본 아사히신문 내 서울특파원 경험자들에게 얘기를 듣고 그들이 회장을 추모하며 말해준 ‘성실함’, ‘인정 많음’, ‘서민파’, ‘야인기질’, ‘강골의 신문인’ 등의 표현을 조사에 써 넣어 갔다.
회장은 판소리를 애호해 그 보호나 진흥에 열심이었다고 듣고 있었다. 장례식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슬픔을 위로하듯, 때로는 혼을 격하게 흔들어 대는 듯한 판소리가 행사장을 압도했다. 가사의 뜻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통곡이자 흐느낌으로 들렸던 절창은 내 가슴에 깊이 스며들어 왔다. 판소리 명인 안숙선 여사의 고별창(告別唱)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다시 한번 회장과의 고별에 어울리는 운치 있는 취향이라고 느꼈다.
동아일보에서는 장례식 다음 달에 명예회장의 장남, 김재호 씨의 사장 승격이 발표됐다. 새 사장은 게이오대 유학 경험이 있고 이전부터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그의 초대를 받아 11월에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에 도착한 날 차로 1시간 반여 걸리는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김씨 일가의 선산에 가서 김병관 회장의 영전에 합장했다. 이 여행에서는 전북까지 찾아가 동아일보와 고려대의 창립자인 회장의 조부 인촌 김성수 선생의 생가에도 가볼 수 있었다.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저택은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었다. 나는 저택 내 한구석에 서서 이곳을 출발점으로 훗날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한국의 정재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촌 선생의 불굴의 여로를 생각해 보았다.
민족 독립의 깃발을 내걸고 근 100년 전에 창간된 동아일보는 일본의 식민지배 당시 수시로 발매 금지나 정간을 강요당했다. 독립 후에도 군사정권을 상대로 투쟁하며 고난 가득한 형극의 길을 걸어왔다. 그것은 또 창업 가문인 김씨 일가의 역사와도 겹친다.
김병관 회장의 부친, 김상만 씨는 박정희 정권의 강권 발동에 의한백지광고 사태를 맞아 그 궁핍을 견뎌냈다. 종국에는 동아일보의 사운을 건 저항과 국제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정권 측이 ‘동아 때리기’를 단념했는데, 당시의 경위를 만년의 김상만 회장으로부터 직접들을 기회가 있었다. 회사 전체가 똘똘 뭉쳐 싸운 자랑스러운 사사(社史)의 금자탑을 담담하게 회고하는 그분의 어조가 지금도 인상에 깊이 남아 있다.
3 대째인 김병관 회장의 경우도 영광과 시련에 가득 찬 만 73년의생애였다. 아사히신문은 그의 서거를 알리는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에 대해 군사정권이 개입해 왔을 때 김 회장이 “성역 없이 보도하라”고 기자들을 격려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신문 발행을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니라 언론 보도를 담당하는 가업으로 받아들이고 그 임무를 이어받은 자로서 무거운 책임을 다하려 한, 멋진 ‘신문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