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한진수전 동아일보 편집국 부국장
회장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11월, 제3대 동아일보 노조위원장이 되고 나서였습니다.임금협상을 하며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창 협상을 진행하던 중 당시 사장이었던 회장님이 둘째 아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회장님 뒤에 걸린 ‘公先私後(공선사후)’라는 액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인촌 선생님께서 ‘공선사후’라고 하셨는데…”라고 했더니 그날 공항까지 나가셨다가 바로 되돌아오셨습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임금협상이 타결됐습니다. 그런데 “이 협상안은 내 안(案)이 아니어서 나는 서명할 수 없다. 권오기 부사장과 사인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임금협상안에는 원래 노조의 대표와 회사의 대표가 사인을 해야 하는 것이라며 저도 버텼고, 결국 부위원장들과 부사장이 사인을 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순탄치만은 않았던 노조 생활을 끝내고 편집국으로 돌아와 사회부 차장으로 있던 1996년 2월, 느닷없이 비서부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순간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처음 가서 인사드리고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나도 비서부장을 처음 둬서 잘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그 다음 날 비서실의 여직원이 회장님이 결재한 서류를 모두 제 책상 위에 갖다 놓으며 “회장님이 결재한 서류를 한번 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 뒤 회장님이 결재한 서류들을 보며 이것저것 의견을 말씀드렸고 회장님은 아무 말씀 없이 들어 주셨습니다. 회장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회장님이 돌아가신 뒤인 2010년 10월, 회장님에 관해 제가 작성해 놓은 메모를 보니 첫 구절이 이렇습니다.
“동아일보에서 동아일보를 가장 열심히 읽는 사람. 안경을 벗어놓고 신문을 눈에 가까이 대고 본다. 신문을 다 읽고 난 뒤 다른 일을 하신다. 신문 볼 때는 아무도 그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동아일보에서 가장 열심히, 꼼꼼히 동아일보를 읽는 사람. 동아일보는 회장님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1997년 1월 초 전두환 전 대통령을 안양교도소로,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서울구치소로 차례로 찾아가 면회를 했습니다.
“이 사람이 왜 갑자기 날 찾아왔나?”는 듯 어리둥절해 하는 두 사람에게 회장님이 하신 말씀의 취지는 “과거의 안 좋았던 일들은 다 잊어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장세동 전 안기부장에게는 “날 사무실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앉으라는 소리도 안 하고 ‘당신, 그 따위로 신문 만들어서 되겠어! 여기서 나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어’라고 호통을 쳤다”고 하자 장 전 부장이 어색해하며 “에이, 내가 언제”라며 머쓱해하기도 했으나 웃으며 악수하고 헤어졌습니다. 장 전 부장과는 출소한 후 몇 차례 통음했다고 합니다.
전 전 대통령은 출소 후 허삼수, 허화평, 이학봉 등 측근 40여 명과 북한산 등산을 한 뒤 삼겹살로 회식하는 자리에 회장님을 초대했는데 그날 두 사람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어깨동무까지 하고 밖을 나섰습니다. 회장님은 마음에 담고 가는 일이 없었습니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사이에 있었던 일도 들려주었습니다. 김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패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영국으로 떠나기 전에 만났습니다. 이때 DJ가 두 손을 꼭 잡으며 귀에 대고 “다음에 한 번만 더 봐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런 DJ에게 세무사찰을 당하고 몇 년 뒤, DJ가 대통령을 그만뒀을 때 한 사내 인사를 시켜 인촌 관련 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초청장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참석하겠다고 했다가 얼마 후 몸이 불편해 참석하지 못하겠다 하여 두 분의 만남은 다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일로 남습니다만 저세상에서는 분명 회포를 풀었을 것으로 믿습니다.
메모에는 회장님께서 불편부당(不偏不黨) 시시비비(是是非非)란 말을 자주 하셨고 동아일보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마디로 정리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느 땐가 양모 씨(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가 찾아와 당시 자기가 모시던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과 회장님의 식사 자리를 한번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두 차례 찾아와 부탁을 해 회장님께 보고 드렸더니 “나는 만나지 않겠다. 그러나 상대방 입장도 있으니 다른 사람들을 대신 만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한보 사건이 터지자 “내가 안 만나길 잘했지”라며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익사업을 좀 더 다각화하자는 건의에도 “신문쟁이는 신문만 만들어야 한다”고 하던 외골수였습니다.
회장님은 항상 무슨 일이든 곱씹어 보고 골몰히 생각했습니다. 보고드리러 방에 들어가면 턱 밑에 손을 괴고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차를 타고 여행할 때도 늘 무엇인가 생각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모님에 대해서는 말씀을 잘 하시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한번 경남 밀양에 있는 사모님 선산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처남, 처제들과 노래방을 갔는데 노래 부르다가 울고 또 울고…. 그 다음 날 아침 해장국을 먹으면서까지 울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날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전라도 경상도 따지는 게 싫어서 무조건 경상도 여자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하셨습니다.
회장님은 소탈하고 꾸밈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호텔같은 곳에서 식사하시는 경우도 없었고 하동관 곰탕, 곰보 추탕, 마포설렁탕, 향촌 등 그냥 보통 사람들이 다니는 곳을 즐겨 찾았습니다.
노조 집행부가 구성되고 나면 꼭 데리고 가는 집이 있었습니다. 허리우드극장 인근 1000원짜리 우거지국밥집이었습니다. 요즘 보니 송해 선생이 자주 갔다는 집이고 지금도 국밥 값이 2000원입니다.
1991년 제가 노조 위원장이던 시절, “이제 노조 하는 사람들도 골프를 다 치니 나도 배워야겠다”며 뒤늦게 골프를 시작하셨습니다.
권영길 씨가 언노련 위원장이 돼 인사차 찾아왔을 때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회장님한테 가야 소주 한잔 사 주시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제일 마지막 순서에 왔다”고 하자, 식사나 하러 나가자며 “직원들과 소주나 한잔하시오” 하면서 봉투를 쥐여 주셨습니다. 이에 권영길 씨가 “어떤 사장은 커피 한잔 시켜 놓고 한마디도 안 하던데…”라며 허허 웃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술 한잔 하시면 노래방을 자주 갔습니다. 저음을 내리깔아 허스키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만남’을 열창했고 흥이 나면 곱사춤도 추셨습니다. 인촌 선생이 시켜 어릴 때 6개월 정도 창(唱)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 회장님이 수술을 하고 처음 출근하는 날 회사 앞으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잠깐 동안이지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인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침묵이 흐르자 마이크를 잡고 노래 부르는 모습을 흉내 내며 이제 이것도 못 하게 됐다는 말씀을 몸짓으로 해 어색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풀렸습니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려는 배려에서 나온 모습이었습니다.
인촌 선생의 친일 시비가 일어났을 때도 “잘 살펴봐서 잘못이 있으면 사과하고 말지”라며 검토를 지시하셨습니다. 이처럼 회장님은 담대하셨습니다. 인촌 선생에 대한 친일 시비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가리키는 단견(短見)이라고 생각합니다.
2001년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천하를 주유하는 심정으로 이곳저곳을 많이 다니셨습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백담사 대흥사 해인사 등 사찰을 자주 가셨고 절에 갈 때마다 기와 불사를 꼭 하셨습니다. 흰 봉투 두 장에 1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씩을 넣고 봉투 하나에는 ‘동아일보’, 또 다른 봉투에는 가족 이름을 적어 불사함에 넣었습니다.
회장직을 그만두고 개인적으로 여행 갈 때 회사가 갖고 있는 회원권으로 콘도 예약도 못하게 했고 공항 귀빈실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고려대병원에 입원해 있던 마지막 즈음 일요일, 텅 빈 고려대 캠퍼스와 중앙학교 교정을 구석구석 몇 차례나 둘러보고 또 둘러봤던 일이 눈에 선합니다.
회장님 돌아가신 뒤 10년이 지나 회고하는 글을 쓰다 보니 회장님을 다시 만나 뵌 것 같아 감회가 새롭습니다.
회장님, 부디 평안하십시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