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김창혁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2008년 2월 화정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뒤 5, 6개월쯤 지난 어느 여름날이었다. 나는 경기 남양주에 있는 화정 회장의 산소를 찾았다. 소주를 따르고 절을 올렸다. 마음속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서러웠던 것 같다. 아직도 드리고 싶은 말이 많은데, 정말 많은데. 이런저런 세월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나는 2000년 노조위원장을 하면서 화정 회장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1년간 임기를 마친 후에도 화정 회장은 가끔 나를 부르셨다. 어느 날은 신문사 앞에 차를 세워둔 채 부르시기도 했다. 내려가뵈면 “오늘 아침 (네가 쓴) 기사 참 좋더라”라고 한마디 하시면서 격려해 주시고는 금세 가셨다.
2002년 1월 13일 화정 회장을 만난 장면도 또렷이 기억난다. 날짜까지 기억하는 건 그날이 화정 선생의 결심공판 하루 전날이었기때문이다. 그날 화정 선생은 교보빌딩 뒤편에 있는 ‘반줄’로 나를 호출했다. ‘반줄’은 화정 회장이 즐겨 찾으시던 작은 술집이었다. 가보니 스탠드 자리에 혼자 앉아 계셨다. 화정 회장이 품속에서 A4 용지 몇 장을 꺼냈다. “내일 최후진술서야. 한번 읽어 봐.”
아직까지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아오면서’라는 대목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실제 법정에서 공개한최후진술서에는 그 대목이 없었다. 여러 차례 퇴고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내가 본 초고의 그 대목은 사라진 것 같다. 화정 선생은 종종 스스로를 ‘동아일보 대표기자’라고 자임했다. 정색을 하고 말씀하신 건 아니었고, 나는 농반진반(弄半眞半)쯤으로 흘려들었다. 그런데 그날원고에서 읽은 ‘언론인’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동아일보를 대표하는 화정 선생의 자존심이랄까, 자신만의 도덕률 같은 것을 느꼈다. 당시 어떤 마음으로 원고를 쓰셨을지 지금에서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다.
1997년 1월 내가 주간지 뉴스플러스에 파견돼 정치기사를 담당하던 때 나는 화정 선생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화정 선생이 안양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면회했는데 그 전말을 기사화하게 된 것이다. 인터뷰를 하기 전에 화정 회장께 말씀드렸다. “회장님, 이건 (기사로서) 얘기가 되니까 쓰는 겁니다.” 기사 내용에 대해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굳이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화정 회장을 인터뷰하고, 기사를 쓰고, 레이아웃을 하고, 초판이 나올 때까지 화정 선생은 일절 아무런 말씀도 없었다.
그때 썼던 인터뷰 기사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온다.
동아방송을 빼앗긴 회사 차원의 언론탄압 외에도 5공 때 동아일보 발행인으로서 김 회장은 개인적인 위협도 자주 받았다고 한다. 김회장은 자신과 전 씨와의 ‘불행했던 역사’ 한 토막을 소개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 타도’의 시민데모가 쏟아지고 시국이 극도로 긴장돼 있을 때 당시 전 대통령은 중앙 언론사 발행인들을 청와대로 초청, 시국에 대한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전 대통령은나를 지명하면서 시국 수습 대책을 물었다. 나는 ‘국민의 뜻에 따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딱 한마디를 했다. 전 대통령은 즉각적인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임을 마치기에 앞서 단호한 어투로 ‘나는 대통령의 임기를 하루도 더 하거나 덜 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그만두더라도 한두 신문사는 문 닫게 할 수 있어’라고 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김 회장은 당시 5공의 대표적 강경파로 서슬이 퍼렇던 장세동 안기부장에게도 불려가 협박과 입에 담지 못할 험구를 들었다.
“한번은 안가(安家)에 불려갔는데 장 부장이 나를 가리키며 ‘당신 그따위로 신문 만들어 돈 벌어서 죽을 때 가져갈 줄 아시오? 당신! 지금 나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어!’라고 소리쳤다. 본인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살기등등한 목소리였다.”
김 회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초에 바로 그 두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색을 했다.(1997년 뉴스플러스 69호에 실린 당시 기사 중)
화정 회장이 전두환 면회를 결심한 것은 그해 1월 1일자 동아일보발행인의 새해 권두언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화해와 용서를 통한 국민 대통합, 그것이 그해 권두언의 핵심 메시지였다. 그러니까 권두언이 대국민 제언이었다면 전두환 면회는 화정 나름의 ‘나부터’ 실천 방안이었던 셈이다. 아마 ‘동아일보 대표기자’라는 평소의 생각답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얘기를 듣고 내린 결단이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건 언론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자각, 무엇보다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하는 동아일보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일 아닐까 싶다. 그 역할에 대한 생래적(生來的) 자각, 그런 게 화정 회장에게 있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동아일보는 한국의 언론사 중에서 유일하게 사시(社是)를 가지고있는 신문사다. 첫째,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한다. 둘째,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셋째, 문화주의를 주창한다. 문득, 그 사시가 화정 회장에겐 ‘마음속의 헌법’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동아일보 설립자 집안의 계승자로 태어났다. 어려운 시간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사시에 대한 자각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수습기자 때부터 동아일보를 그만둘 때까지 화정 회장에게서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노조위원장 시절 화정 회장에게 서한을 보낸 적이 있었다. “밖에 나가 보면 세상에 널린 게 회장님입니다. 삼성, 현대, LG 그리고 또 무슨 무슨 그룹 회장. 하지만 이제 막 입사한 수습기자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회장은 흔치 않습니다.” 바로 내가 수습기자 때 목도한 화정 회장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쓴 편지였다. 동아일보가 국내 최초로 볼쇼이 발레단을 초청했을 때 당시 문화부장이 “어렵게 성사시킨 역사적인 공연인 만큼 좌석당 20만 원은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화정회장은 “우리가 문화사업을 한다면서 그렇게 비싸게 받으면 일부 부유층만 (공연을) 향유하게 되는 것 아니냐”면서 오히려 면박을 줬다.옛날 실비집 서린낙지에서 목격한 장면인데, 그때만 해도 속으로 ‘화정 회장에게 저런 면모가 있구나’라고만 생각했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 모든 것이, 민족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하고민주주의를 지지하며 문화주의를 사랑하는 동아일보의 대표 언론인으로 살고자 했던 화정 회장 스스로의 정언명법(定言命法)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목록